"국내 대기업집단 가운데 가장 효율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먹잇감을 제대로 골랐다."
행동주의(경영참여형) 국내 사모펀드 운용사 KCGI가 만든 그레이스홀딩스가 지난 15일 한진칼 주식 532만2666주(지분율 9.00%)를 사들였습니다. 이 펀드가 한진칼 2대 주주로 올라서자 증권업계와 재계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반응입니다. 한 마디로 "그럴 만했다"는 기운이 느껴집니다.
왜 이런 상황이 연출됐을까요? 한진칼을 지주회사로 둔 한진그룹의 지배구조는 다른 대기업 집단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한진은 다른 곳보다 먼저 공격대상이 됐고, 이번에 KCGI가 경영권을 압박하는 강도나 사안을 둘러싼 분위기도 심상치 않습니다. 무엇이 종전과 달랐던 걸까요?
◇ 왜 한진이었을까
한진칼은 조양호 회장 등 오너 일가의 지분이 28.95%인 한진의 지주회사입니다. 이를 통해 조 회장은 대한항공, 진에어, 칼호텔네트워크 등 계열사를 지배합니다.
한진은 지난 2013년 8월 대한항공을 인적분할 해 지주사 한진칼을 출범했습니다. 이를 통해 '대한항공→정석기업→㈜한진→대한항공'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순환출자 고리를 깨고, 한진칼을 통해 대부분 계열사를 지배하는 구조로 전환한 겁니다.
하지만 한진칼은 그 지배력에 비해 덩치가 작습니다. 시가총액 3조원 넘는 대한항공과 다른 계열사를 지배하면서도 시가총액은 1조8000억원에 그칩니다. 더구나 KCGI가 한진칼 지분을 산 것을 밝히기 전(그래서 한진칼 주가가 급등하기 전) 시총은 1조2000억원정도였습니다. 지분 10%라고 해봤자 1200억원이면 살 수 있는 사이즈였던 겁니다.
삼성이나 현대차였다면 가능했을까요? 각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인 삼성물산은 시총 18조3000억원, 현대모비스는 시총 16조3000억원 규모입니다. 1200억원 정도 금액으로 영향력은 커녕 지분을 보유한 티도 내기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자금력이 크지 않은 토종 펀드가 대상으로 삼기에 한진은 '안성맞춤'이었던 겁니다.
한진칼은 조 회장 등 오너들이 가지고 있는 지분도 경영권 유지에 딱 필요한 만큼이었습니다. 절대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과반을 가진 것이 아니죠. 조금만 세를 규합하면 경영권의 판을 뒤집을 가능성이 높은 게 한진칼을 지주로 둔 한진그룹이었습니다.
▲ 물컵 갑질 후 포토라인에 선 한진 일가. 왼쪽부터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 조현아 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
◇ 공격 빌미 제공한 한진
더 큰 이유는 한진그룹 오너십을 불편해 하는 여론입니다. 너무 잘 알려진 이른바 '땅콩 회항', '물컵 갑질' 등 딸들의 문제로 아버지 조 회장이 포토라인에 선 게 몇 번이던가요. 또 조 회장 아내 이명희 전 일우재단 이사장의 폭언 폭행, 조 회장 자신의 자택 인테리어 비용 배임 혐의 등이 일반의 차가운 시선을 뒤집어 썼습니다.
오죽하면 대한항공 직원들마저 거리로 몰려나와서 '총수 경영 일선 퇴진'을 외칠 정도였을까요. 따가운 여론 자체는 한진 경영권에 직접적 타격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를 근거로 다른 투자자들이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건 한진 오너 일가에게는 치명적입니다.
KCGI가 앞장서 기존 오너십에 반하는 안건을 제시하면 지분 8.35%를 들고 있는 국민연금, 5.03%를 쥔 크레디스위스, 3.81%를 보유한 한국투자신탁운용 등이 따라나설 수 있습니다. 이것만 해도 26.19%로 최대주주 몫과 큰 차이 없습니다.
특히 국민연금은 지난 6월 대한항공에 총수 일가 의혹에 대한 해결 방안을 제시하라는 서한을 보내기도 하는 등 투명한 지배구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한국투자신탁도 '스튜어트십 코드'를 도입한 운용삽니다. 여론을 보면 58.38%를 쥔 기타 주주들도 기존 경영진 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KCGI가 한진을 겨눈 건 기업 규모에 비해 이슈 파급력이 크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재벌 갑질의 대명사'라 할 정도로 워낙 언론 지상에 오르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KCGI로서는 한진이라는 '핫'한 기업집단을 건드린 이력을 향후 투자 유치 규모를 키울 수 있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
◇ '국뽕' 안 통하는 토종펀드
KCGI는 내년 3월 정기주주총회 전까지 적자 부동산 매각, 배당 확대 등을 요구할 것이라는 게 증권업계의 보편적 예상입니다. 펀드 본연의 목적이 수익률 제고인 만큼 한진칼 주가를 올릴 개선안을 기존 경영진에 주문하는 게 순서죠. 칼호텔 및 그룹 유휴자산을 매각하는 구조조정이 주로 거론됩니다.
한진 기존 경영진이 이런 공격을 거절하기 쉽지 않은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KCGI 태생이 토종 사모펀드라는 점입니다. 과거 소버린의 공격을 받았던 SK그룹, 삼성그룹과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 때 개입한 엘리엇 등과 다른 점입니다.
SK나 삼성, 현대차 모두 당시 주된 대응 논리를 '국부유출'로 잡았습니다. 단기 투자차익을 노린 헤지펀드가 한국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한다는 논리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이를 동력 삼아 투자자들을 우군에 설 명분을 제시한 겁니다. 하지만 태생이 국산인 KCGI를 대상으로는 한진이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한진그룹은 KCGI의 등장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지주사인 한진칼에 조양호 회장과 장남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석태수 대표이사 등이 사내 등기임원으로 올라 있습니다. 내년 3월이면 사외이사 2명의 임기가 만료되고 신임 이사를 뽑아야 합니다.
KCGI는 "경영권 장악 의도는 없지만 견제와 감시에 충실하겠다"고 선을 그어두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명분을 위해 적어도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할 사외이사를 추천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 나옵니다.
경영권 방어 움직임도 감지됩니다. 한진그룹 측은 지난 21일 "백기사 역할을 할 투자자를 찾기 위해 자문사 계약을 검토 중"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의 부정적인 여론이 팽배해 백기사 찾기가 쉽진 않을 것이란 예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