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델타항공이 한진가(家)의 '우군'으로 등장하면서 한진칼 2대주주인 KCGI의 속내가 복잡해졌다. 델타항공의 매입 지분이 한진가 우호지분이 될 경우 경영권 분쟁은 사실상 고(故) 조양호 회장 유족 일가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1일 델타항공은 홈페이지를 통해 대한항공과 조인트벤처(합작회사) 제휴 강화를 위해 대한항공 모회사인 한진칼 지분 4.3%를 인수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국의 규제 승인을 받는대로 한진칼 지분을 10%까지 늘릴 것이라고 예고했다.
업계에선 미국 델타항공의 한진칼 지분 매입으로 한진가의 경영권 수성이 한층 수월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델타항공이 한진칼 주식을 10%까지 늘릴 경우 한진가의 우호 지분이 38.98% 수준으로 늘어난다. 이 경우 한진칼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는 KCGI(15.98%)의 지분 격차가 20% 넘게 벌어지게 돼 경영권 분쟁은 더이상 무의미해진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델타항공은 이번 한진칼 지분 매입 배경을 단순히 대한항공과의 제휴 강화, 자사의 이익을 위한 투자라고 밝혔다. 하지만 한진그룹 안팎에선 델타항공을 우호 세력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대한항공 관계자도 "델타항공이 조인트벤처 파트너사인 대한항공의 경영권 안정을 위해 한진칼 지분을 매입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양사는 이미 20년 전부터 항공 동맹체인 '스카이팀' 멤버로 함께 활동해 왔다. 그런 데다 지난해 5월부턴 합작사(조인트벤처)를 설립, 공동 운영할 만큼 공고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꾸준한 지분 매입으로 한진가와의 지분 격차를 줄여 오던 KCGI로선 난감한 상황을 맞이했다. 대출까지 받아가며 한진칼 지분을 늘려왔지만, 델타항공의 가세로 다시 한진가와의 지분 격차가 크게 벌어졌기 때문이다.
지분 추가 매입을 통해 대응 가능하지만 여의치가 않다. 최근 미래에셋대우에 이어 하나은행까지 KCGI의 한진칼 주식 담보 대출 연장을 거절했다. 자금 확보는커녕 이달 만해도 200억원이 넘는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상황이다.
고액 자산가 대상 기업설명회(IR)을 통해 투자자 확보에 나서곤 했지만, 아직 큰 성과는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엑시트(투자금 회수)에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보유 물량이 많은 데다 한진그룹의 유일한 견제 세력인 KCGI가 지분 매각에 나설 경우 주가 하락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주가 하방이 확실한 지분을 살 투자자도 없는 만큼 블록딜(Block-Deal·시간외대량매매)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 시각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델타항공의 매입지분을 우호지분이라고 확신할 수 없지만, 대한항공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차원인 만큼 한진가에 힘을 실어주기 위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며 "KCGI가 추가 지분 매입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양측 간 경영권 분쟁은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한편 KCGI는 이날 델타항공의 대한항공 지분매입과 관련 입장문을 내고 "글로벌 항공사 시가총액 1위인 델타항공은 워렌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헤서웨이가 최대주주로 공정하고 투명한 의사 결정구조와 시장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델타항공이 경영권 분쟁의 백기사로서 한진칼의 지분을 취득한 것이라는 항간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이는 델타항공이 그동안 쌓아온 명예와 스스로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델타항공이 한진그룹 측과의 별도의 이면 합의에 따라 한진칼 주식을 취득한 것이라면 이는 대한민국의 공정거래법, 자본시장법 등 법률 위반"이라며 "델타항공이 이번 투자와 관련해 대한민국의 법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당부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