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셀 기술력이 최근 몇 년간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고 해서 안주해선 안 된다. 지금의 배터리 업계는 엄청난 경쟁이 이어지고 있는 전쟁터다. 이제 막 완성차 기업들이 벤더사를 확정 짓는 추세이기 때문에 지금 승기를 잡는 곳이 한동안 기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지금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국가 전략 산업으로 떠오른 배터리 업계를 바라보는 최근의 시각은 우려 반 기대 반이다. 셀 기술력에서 세계 최고로 평가받으며 호황기를 맞고 있지만, 물량을 앞세운 중국 등을 감안했을 때 향후 전망이 그리 밝지 않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전략 수정의 필요성도 언급된다. 미국과 유럽연합이 각각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핵심원자재법(CRMA)을 내세우며 공급망 경쟁에 나선 탓에 K배터리는 ‘탈중국’과 ‘친환경’을 동시에 만족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에 정경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에너지저장연구센터장은 △공급망 다변화를 통한 소재·원재료 내재화 △기술연구를 통한 차세대 전지개발 및 인력 양성 △정부의 정책 보완 및 외교적 문제 해결 등을 방안으로 제시했다. 정 센터장은 현재 KIST 에너지저장연구센터를 이끌며 한국전기화학회 이차전지분과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배터리 분야 권위자다.
그는 공급망 다변화에선 친환경 공법을 통한 정제기술 적용을, 기술연구에선 소재 부문의 경쟁력 확충 등을 구체적으로 강조했다.
아울러 최대 라이벌 중국기업과의 경쟁에선 “지금과는 다른 느낌으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중국 내 배터리를 핵심 산업으로 지정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일례로 중국 CATL의 경우 직원 수가 몇 년 사이 2만명에서 4만명 가까이로 늘었는데 이는 엄청난 규모다. 중국 내 배터리 산업에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는 방증”이라는 게 정 센터장의 진단이다.
아래는 정 센터장과의 일문일답이다.
친환경 공법·공장 분산으로 원자재 공급망 쥐어야
- 배터리를 둘러싼 미국과 유럽의 공급망 전쟁이 격화되고 있다. 한국 배터리 기업들에게 이러한 글로벌 정세는 어떤 의미인가
▲ 당장의 상황으로는 위기, 장기적 관점에선 기회의 가능성이 크다. 우선 미국 IRA를 살펴보자. 해당 법안은 쉽게 말해 ‘중국 배제’가 핵심이기 때문에 이를 잘 활용하면 한국 기업들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유럽의 CRMA는 IRA보다 중국 배제의 강도가 덜하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역내 생산 및 원자재 공급 안정성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선 공통점을 갖는다.
결국 문제는 소재와 원료 상당 부분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렸다. 시장자료에 따르면, 현재 배터리 4대 핵심 소재인 양극재·음극재·전해질·분리막의 50% 이상을 중국이 점하고 있다. 또 그것을 만드는 원재료 부문에선 전 세계 시장의 최대 80% 가량을 중국이 차지한다. 때문에 소재 및 원재료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내재화하는 방법을 통하면 우리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
- 원재료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이유는 정제 부분에서의 환경적 문제가 주효하다고 하던데
▲ 그렇다. 중국이 원재료 공급망 시장에서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배경엔 온실가스가 있다. 정제할 때 온실가스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대개의 선진국에선 하길 꺼리는 반면 중국은 환경 문제에 비교적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에 국내 기업들은 외국의 염호 등을 사서 직접 원재료를 생산한다는 방침을 최근 밝혔다.
다만 중국과 같은 방식으로 정제할 것 같진 않다. 친환경 공법을 개발해 온실가스 배출량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진행할 계획인 것으로 안다. 또 여러 나라에 정제 공장들을 분산하는 식으로 원재료 공급망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IRA 등 상황이 아니더라도 특정 국가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에 해당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 지난 8일(현지시각) 미국 컬럼비아대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IRA을 도입해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도 배터리는 향후 10년간 중국의 그늘을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데. 어떻게 보나
▲ ‘완전히 벗어난다’는 개념이 모호하지만 10년간 미국이 중국의 배터리 소재와 원재료를 전혀 쓰지 않기란 쉽지 않을 수 있다. 곧 보급될 전기차에 대해 완성차 기업들이 배터리 기업에 주문을 넣고 선계약을 하는데, 이 공급을 맞추는 것이 상당히 버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중국을 제외하면 실질적으로 남아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일본의 파나소닉이 있긴 하나 이 기업의 올해 시장 점유율이 지난해 대비 유지 및 감소 수준으로 파악돼 예전 같지 않은 상황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결국 남는 것은 한국인데, 우리가 미국에만 배터리를 파는 것이 아니어서 쏟아지는 물량을 완벽하게 맞추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한국 기업들이 향후 북미 라인을 대대적으로 증설해 수요를 커버하겠다고 나서게 될 경우도 배제할 순 없다.
‘전고체 배터리’ 2025년은 넘어야…소형전지로 먼저 나올 것
- 중장기적으로 승기를 쥐기 위해 기술경쟁력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최근 국내외 업계 화두는 ‘꿈의 배터리’로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다. 전고체 배터리 특징에 대해 설명한다면
▲ 앞서 리튬 이온 배터리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하자면, 배터리의 양극과 음극이 직접 닿지 않게끔 하기 위한 분리막이 있다. 그 사이를 전해액이란 액체로 채우면 리튬 이온 전달의 경로가 된다. 과거엔 전해액으로 물 기반인 수계가 사용됐는데 최근엔 유기계가 적용되고 있다. 유기계를 쓰게 되면서 전압은 높아졌지만 불이 붙을 수 있다는 단점을 함께 갖게 됐다. 가연성 유기용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안된 게 전고체 배터리다. 전해액 대신 불이 붙지 않는 것 중에서도 고체를 집어넣자는 것이다. 몽땅 다 고체라는 의미에서 ‘전(全)’이 붙었다.
- 어떤 고급 기술이 필요한 배터리이기에 각 기업이 연구개발에 공을 들이는 것인지
▲ 액체가 고체로 바뀌면 이온 전달이나 이온 전도도 부분에서 훨씬 불리하다. 아주 과거엔 고체에선 이온이 이동하지 않는다는 게 보편적 입장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고체에서도 이온 전달이 발생한다는 것을 밝혀낸 이후 기술을 계속 끌어올리고 있다. 아직까지 충분히 올라오진 못했다. 배터리의 수명을 늘리는 작업, 고체 전해질의 가공성을 높이는 방법 등 연구가 더 필요하다.
- 전고체 배터리가 개발된다면 시기는 언제쯤일까. 그리고 어떤 제품들로 나올까
▲ 관련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일본 토요타가 오는 2025년 전고체 배터리를 탑재한 전기차 양산 계획을 발표했지만 계속 미루는 모양새다. 토요타 선언에 위기를 느낀 한국 배터리 기업들도 2027년 즈음 전고체 배터리 양산 선언을 했다. 개인적 생각으로는 이들의 목표 시점보다 조금 더 걸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전기차용 배터리보다 전동공구나 가전제품 모터 등에 적용될 소형전지부터 먼저 나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
- 전고체 배터리가 출시되면 다른 배터리 종류들은 시장서 살아남기 어려워 지나
▲ 상관없을 것이다. 전고체 배터리와 성능 및 특성이 유사한 배터리들의 시장은 다소 줄어들겠지만, 여태껏 새로운 배터리가 나왔다고 해서 나머지 배터리가 사라지게 된 적은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납축배터리’를 들 수 있다. 납축배터리는 1859년에 개발된 전지다. 자동차 보닛을 열면 보이는 밧데리가 바로 이것이다. 이후 1991년 리튬 이온 배터리가 개발됐고 ‘가장 좋은 성능을 갖춘 배터리’라며 수요량도 급속히 늘어났으나, 놀랍게도 5~7년 전까지 실제 시장 규모는 납축배터리가 더 컸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항상 시동과 전조등이 켜져야 하는 성능의 신뢰성 및 가격이 가장 중요하고, 리튬 이온 배터리만큼의 뛰어난 성능과 높은 가격은 부담이기 때문이었다.
- 그렇다면 전고체 배터리 출시 이후 전체 배터리 시장은 오히려 더 커질 가능성이 있나
▲ 그렇다. 결과적으로 배터리 산업은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점점 시장이 급격히 팽창할 것이 분명하고, 그 속에서 전고체 배터리 등 새로운 존재가 나오면 그 특성에 맞는 응용처를 찾아내 가며 퍼질 가능성이 크다. 전고체 배터리와 리튬 이온 배터리는 유사한 특성이 꽤 있기 때문에 일정 부분 대체가 되겠지만 그렇게 될 때까진 시간도 상당히 소요될 것으로 본다.
셀 기술은 한국이 선두, 소재 기술은 보완해야
- 국내 기업들이 LFP 상용화를 위한 연구에 돌입했다. 한국 기업이 해당 시장에 진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봐야 할까
▲ 몇 년 전만 해도 전기차를 얘기할 때 1회 충전 시 주행거리를 굉장히 중시했다. 그 관점에선 배터리의 에너지 밀도를 늘리는 것이 관건이었고, 이에 적합한 NCM 계열 배터리로 선로를 정하는 게 유리했다. 때문에 한국은 성능을 개선하는 쪽으로 연구개발을 지속해왔다. 반면 중국은 가격적인 부분에서 유리하니 LFP에 집중했다. 최근 시장 자료에 의하면, LFP는 2030년경 전기차 시장 내 10~15% 정도 수준을 점유할 것으로 파악된다. 적은 규모는 아니지만 메이저 역시 아니라는 의미다. 이러한 현 상황에선 한국 기업이 NCM에 방점을 두는 것이 당연하고, 팔로업 차원서 LFP 개발을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LFP에서도 갑자기 어떤 돌파 기술이 나올지 모르니 항상 어느 정도 주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LFP : 리튬·인산·철을 사용한 배터리. 주요 소재인 철(Fe)과 인(P)이 값싸고 풍부해 가격적 이점이 있다. 화학구조도 안정적이라 발화·폭발의 위험을 쉽게 낮출 수 있어 기술적 난이도도 낮은 편이다.
NCM : 한국 배터리 3사가 주로 생산하는 리튬 이온 배터리. 니켈·코발트·망간 등 ‘3개 물질을 조합한 양극 활물질’을 활용함으로써 ‘삼원계 배터리’로도 불린다. LFP 대비 에너지밀도가 높아 더 진보된 기술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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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기차 배터리를 '성능 vs 가격'으로 볼 때, 최근 가격부분 매력도가 커지고 있다. 이유는 무엇일까
▲ 예전엔 우리가 전기차를 구매할 때 차 가격이 비싸도 보조금을 주니 심리적 부담이 적었다. 그런데 최근 주요 자동차 생산 및 소비국들에선 전기차 구매보조금을 축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존 전기차 구매 장벽은 더욱 높아지는 셈이다. 이에 저가의 소형 전기차를 통해 보급률을 높이고 시장주도권을 쥐기 위한 완성차 기업들 움직임이 보이고 있다.
적당한 가격의 전기차를 사고 싶은 소비심리가 생기는 시점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1회 충전 시 주행거리가 조금 짧더라도 값이 싼 전기차가 인기를 끌 때다. 그런 측면에서 LFP의 경쟁력이 좀 더 강해졌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같은 영역에서 LFP와 NCM이 경쟁하진 않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LFP는 NCM보다 에너지 밀도가 높을 수 없고 저온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치명적이다. 따라서 향후 전기차 배터리 시장의 메이저는 NCM이, LFP는 일부를 창출하는 구조로 가지 않을까 생각된다.
- 현재 K배터리의 기술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 셀 기술에선 한국이 선두라는 게 세계적 평가다. 얼마 전까진 일본이 1등이었지만 이후 일본 내 해당 산업이 꺾이는 분위기다. 다만 소재로 가면 얘기는 다르다. 소재 전체를 보면 한국이 자신있게 선두라고 할 수 있을지 좀 더 생각해봐야 한다. 특히 음극재·전해질·분리막 등 관련 기술은 아직 더 끌어올려야 한다.
- 그렇다면 중국과의 기술경쟁에선 한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봐도 무방한가
▲ 현재 기준 기술만 본다면 조심스럽지만 중국보다 한국이 더 잘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의 중국을 지금과 다른 느낌으로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라는 국가 특성상 확실한 정보가 오픈된 것은 아니지만, 배터리를 중국 내 핵심 산업으로 지정했다는 소문이 들린다. 일례로 중국 CATL의 경우 직원 수가 몇 년 사이 2만명에서 4만명 가까이로 늘었다. 이는 엄청난 규모다. 중국 내 배터리 산업에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투입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 앞으로 K배터리가 가야 할 길은
▲ 우선 최근 몇 년간 선두로 치고 올라왔다고 해서 안주해선 안 된다. 지금의 배터리 업계는 엄청난 경쟁이 이어지고 있는 전쟁터다. 이제 막 완성차 기업들이 벤더사를 확정 짓는 추세이기 때문에 지금 승기를 잡는 곳이 한동안 기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승기를 잡을 수 있는 지금의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아울러 기술의 내재화도 필요하다.
보통 배터리 대기업들은 자사 연구를 통해 필요한 소재를 공급받기 위해 일종의 레시피의 일부를 소재 공급처에 줘야만 하는데, 지금 대다수 배터리 대기업들은 중국으로부터 소재를 받고 있다. 이는 결국 일부 레시피를 중국 공급처에 줄 수밖에 없다는 얘긴데, 이러한 부분을 통해 중국의 기술력이 올라간 측면도 있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다. 차세대 배터리 기술을 위한 고급인력 양성에 힘쓰는 한편 배터리와 관련된 정책적 부분과 각 나라 간 외교 문제에 해결 의지를 갖고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