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승범 금융위원장 취임 이후 금융업권을 둘러싸고 많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초강력 대출 규제, 네이버·카카오를 비롯한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 강화 등이 대표적입니다.
얼마 전에는 '은행권 투자자문 확대'라는 새로운 화두가 제시되면서 업계에 파장이 일고 있습니다. 금융당국 수장인 고 위원장이 주요 은행장들과 만난 자리에서 은행권의 투자자문 허용 범위를 확대하겠다고 밝힌 겁니다.
이 발언을 두고 금융업계는 퍽 혼란스러운 모습입니다. '뒷북'이니 '금융업 생태계 파괴'니 뒷말도 무성합니다.
고승범 "은행권 투자자문 영역 확대 검토"
지난달 28일 고 위원장은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허인 KB국민은행장, 진옥동 신한은행장, 박성호 하나은행장, 권광석 우리은행장, 권준학 농협은행장, 임성훈 대구은행장, 서호성 케이뱅크 대표 등 주요 은행장들과 간담회를 가졌는데요.
이 자리에서 고 위원장은 "은행이 종합재산관리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신탁업 제도를 개선하고 부동산에 제한돼 있던 투자자문업을 개방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며 "현재 혁신금융서비스로 운영 중인 플랫폼 사업 등에 대해서도 사업 성과와 환경 변화를 살펴보고 은행의 부수업무를 합리적인 수준으로 확대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은행의 겸영·부수업무 범위를 확대해 주겠다는 얘기인데,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은행권의 투자자문 영역을 넓혀주겠다는 겁니다.
은행 "펀드 투자자문 한지가 언젠데"
하지만 이 발언을 두고 금융업계에서는 고 위원장이 현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뒷북을 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시중 은행들이 5년 전부터 펀드 투자자문 서비스를 시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은행권의 투자자문이 부동산으로 제한돼 있다는 그의 말은 업계 현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겁니다.
실제 은행권에선 지난 2016년부터 로보어드바이저 투자자문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로보어드바이저란 '로봇(Robot)'과 '자문가(Advisor)'의 합성어로 고도화된 알고리즘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투자자문 서비스를 말합니다.
은행권에서 운영 중인 로보어드바이저 투자자문 운용금액과 가입자 수는 타 금융권 대비 압도적인데요.
코스콤에 따르면 은행권의 로보어드바이저 투자자문 운용금액은 지난 9월 말 기준 1조6527억원입니다. 이는 금융·투자업권 전체 로보어드바이저 투자자문 운용금액(1조8521억원)의 89.2%에 달하는 금액으로 자문일임사(1113억원, 6.0%), 자산운용사(828억원, 4.5%), 증권사(53억원, 0.3%)의 로보어드바이저 투자자문 운용금액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입니다. 은행의 로보어드바이저 투자자문 계약자 수도 22만명으로 전 금융업권(40만명)의 절반을 넘어섭니다.
사실상 은행권에선 부동산 외 펀드 부문에서도 투자자문 서비스를 계속해 온 셈이죠.
풀어준 규제를 또 풀어준다?
주목할 만한 점은 2016년 당시 로보어드바이저를 통한 투자자문 확대를 허용한 주체 역시 금융위라는 점입니다. 자신들이 은행의 투자자문 영역을 확대해줬음에도 5년이 지나 똑같은 소리를 반복하면서 뒷북 논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죠.
실제 코스콤 로보어드바이저 테스트베드가 본격 구동을 시작한 2016년 10월에 앞서 같은 해 3월 금융위는 은행에 대한 자문업 겸영을 허용한다고 발표했습니다. 투자자문업자의 영업 범위로 한정된 자문업에 대해 은행의 겸영을 허용한다는 게 골자입니다. 다만 기존 투자자문사가 주로 영위하던 주식·채권·파생상품 운용 자문은 이해 상충 소지가 있다는 이유로 제한했습니다.
고 위원장 발언이 업계에서 논란이 되자 금융위는 반박에 나섰습니다. 그간 은행권에서 관행적으로 무료 서비스로 제공하던 로보어드바이저를 앞으로는 정식 투자자문업자로서 수행하고 수익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일종의 '시그널(신호)'을 줬다는 주장입니다.
금융위 관계자는 "통상 금융산업과 관련한 인가·등록 관련 사항은 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는 만큼 정책적 시그널이 없으면 실질적인 인가 신청으로 이어지기 쉽지 않다"며 "은행의 투자자문업은 기존에도 현행법상 가능하나 업으로서 활용되지 못한 측면이 있어 이번에 금융위원장이 명시적으로 시그널을 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주식·채권도 빗장 푼다?…생태계 교란 우려
단순 뒷북 소동에서 나아가 더 큰 문제를 제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은행권 투자자문의 규제 완화 범위가 펀드뿐만 아니라 주식·채권 등으로 넓어질 경우 '금융 생태계 교란' 등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금융 생태계 교란 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투자자가 입게 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비즈니스워치 취재 결과 현재까지 은행권 투자자문 확대 범위와 관련해 세부적인 내용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금융위는 은행에 대해 주식·채권 영역까지 모두 포괄적으로 투자자문 확대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금융투자업계는 이 경우 금융 생태계에 혼란을 줄 수 있다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은행권에서 투자자문 범위 확대를 계기로 투자일임 진입, 신탁업무 범위 확대 등 중장기적으로 자산운용시장의 고유 영업까지 침범할 수 있다는 불안감의 표현입니다.
금투업계는 주식·채권에 대한 투자자문은 일반적으로 투자 중개 라이선스를 가지고 있는 증권사가 투자자문사, 자산운용사 등과 협업해서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해외 사례를 살펴봐도 은행에서 주식·채권에 대한 투자자문을 하는 경우는 없다는 설명도 곁들이면서 말이죠.
아울러 은행권에 대한 투자자문업 확대가 주식·채권 분야에까지 확대될 경우 투자자 보호도 약화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한 금투업계 관계자는 "파생결합펀드(DLF) 사태를 비롯해 은행권에서 대거 판매에 나섰던 사모펀드 사태의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며 "은행권에서 불완전판매가 많이 발생했다는 점에서 주식·채권 관련 투자자문 확대 허용 시 제2의 DLF 사태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발언이 이처럼 금융업 전반에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온 상황에서 취임 이후 업권의 파격적인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고 위원장이 어떻게 대응할지에 관심이 쏠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