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도입된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의 상품 선정 절차가 본격화될 전망이다. 일반 펀드 상품과 비교가 가능하도록 새로운 펀드 분류 기준(클래스)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일부 자산운용사는 자사 펀드를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지정받기 위해 디폴트옵션 클래스 추가에 나섰다.
다만 오랜 기간 제도 도입을 기다린 것에 비해선 운용사들의 클래스 추가가 다소 더딘 모습이다. 퇴직연금 사업자의 포트폴리오에 선정되지 못했을 경우 판매가 사실상 어려운 '깍두기' 클래스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디폴트옵션 전용 펀드클래스 'O'
15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금융투자협회는 지난달 26일 협회 규정을 개정해 디폴트옵션 전용 펀드클래스인 'O 클래스'를 신설했다.
디폴트옵션은 확정기여(DC)형 혹은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적립금을 운용할 방법을 지시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정해둔 방법으로 적립금이 자동 운용되게 하는 제도다.
상당수 퇴직연금 가입자는 예·적금 등 원금보장형 상품에 가입한 뒤 이를 방치했다. 이들 상품의 수익률은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는 수준에 그쳐 노후 대비를 위한 퇴직연금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많았다.
수익률 개선을 돕기 위해 지난달 12일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이 도입됐고, 이에 따라 새로운 펀드 클래스가 필요해졌다. 디폴트옵션 가입자는 고용노동부의 승인이 완료된 디폴트옵션 전용 상품에만 가입할 수 있어 동일한 명칭의 일반 상품과는 구분돼야 하기 때문이다.
디폴트옵션 전용 클래스 도입 이후 현재 금융감독원에 펀드 클래스 신설을 공시한 운용사는 트러스톤자산운용과 NH-아문디자산운용, IBK자산운용 등 세 곳이다.
트러스톤운용은 트러스톤TIF안정형 펀드, 트러스톤TDF2030~2050 펀드 시리즈에, IBK운용은 IBK인컴바닐라EMP 펀드, IBK플레인바닐라EMP 펀드와 IBK로우코스트TDF2030~2055 펀드 시리즈에, NH-아문디운용은 NH-Amundi하나로TDF2025~2050 펀드 시리즈에 디폴트옵션 클래스를 적용했다.
디폴트옵션은 수익률 향상을 위해 도입된 만큼 디폴트옵션 펀드 클래스는 선·후취 및 판매수수료가 부과되지 않는다. 운용 비용도 클래스 중 가장 낮은 수준에서 책정될 전망이다.
실제 현재 디폴트옵션 클래스가 추가된 IBK자산운용의 IBK플레인바닐라EMP펀드의 디폴트옵션 클래스 총보수·비용은 0.7723%로 퇴직연금 온라인 클래스 0.8328%보다 저렴하다.
깍두기 클래스 될라…신중한 운용사
디폴트옵션 도입은 자산운용업계의 오랜 숙원이었다. 연금 가입자의 자산이 펀드 등 원금비보장형 상품으로 유입되면서 산업 규모가 커질 수 있다는 기대에서다. 실제 지난해 말 기준 DC형과 IRP에 적립된 퇴직연금은 규모는 124조원에 달하는데, 이 중 74%인 92조원이 원금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디폴트옵션 클래스를 추가한 운용사는 세 곳에 불과하다. 제도 도입을 염원한 기간에 비해 시행 후 움직임이 느린 것이다.
고용노동부는 퇴직연금 사업자들에 원금비보장형 디폴트옵션 포트폴리오는 9개만 구성할 수 있도록 하고 각 포트폴리오당 펀드 등의 상품은 3개 이내로 넣을 것을 권고했다. 즉, 퇴직연금사업자가 디폴트옵션 포트폴리오에 최대로 편입할 수 있는 펀드 수는 27개다.
이처럼 좁은 바늘구멍을 뚫어야 펀드에 자금을 유입시킬 수 있는 만큼 운용사들로선 클래스 신설에 신중해질 수 밖에 없다. 디폴트옵션 클래스를 도입했는데 포트폴리오에 선정되지 않을 경우 판매가 어려운데 추가 비용만 들어가는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운용사들 입장에서는 기껏 클래스를 만들어놓고 최종적으로 디폴트옵션 상품으로 승인받지 못하면 헛수고가 될 수도 있다"며 "우선 판매사의 선정을 받고 난 뒤 도입하려는 생각을 갖고 일단 지켜보는 곳도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트러스톤운용과 NH-아문디운용, IBK운용 등 세 운용사를 포함한 일부 운용사들이 발 빠르게 디폴트옵션 클래스를 신설하는 것은 퇴직연금 사업자들로부터 눈도장을 찍기 위한 행동으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디폴트옵션 클래스를 미리 만든 다음 상품 선정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쳤다는 식으로 퇴직연금 사업자에 어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