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은행들이 주가연계증권(ELS) 판매를 잠정 중단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증권사들의 ELS 발행에도 차질이 생겼다. 이미 홍콩 항셍지수(H지수·HSCEI) 하락으로 ELS의 인기가 뚝 떨어진 와중에 주요 판매 채널마저 문을 닫으면서다.
증권업계에선 ELS 발행 축소로 자금 조달이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가 번진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에 대비해 유동성 관리가 절실해진 가운데 자금조달 수단을 다양화하는 것이 과제로 남았다.
ELS 발행잔액 반년만에 7조 '뚝'
7일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 6일 기준 ELS 발행잔액은 33조6971억원으로 집계된다. ELS 발행잔액은 작년 6월말 40조8710억원, 연말 35조7148억으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7개월만에 7조원이 증발한 셈이다.
ELS 잔액이 뒷걸음 치는건 발행량 자체가 계속 쪼그라들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ELS 발행 규모는 75조732억원에 달했다. 그러나 2020년 코로나 팬데믹 초기 마진콜(추가 증거금 납입 요구) 사태로 금융당국이 파생결합증권 규제를 강화하면서 감소세를 보였다. 2020년 41조4400억원, 2021년 50조7442억원, 2022년 27조6356억원을 기록했다.
2023년에는 발행량이 30조1913억원으로 늘었는데, 2분기에만 9조원 넘게 발행된 영향이 컸다. 3분기와 4분기에는 7조원대로 내려앉았다.
ELS 시장은 앞으로도 줄어들 전망이다. 홍콩 H지수 관련 ELS가 올 상반기에만 최대 6조원 손실을 확정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KB국민·신한·하나·NH농협 등 시중은행들이 줄지어 ELS 판매를 중단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은 ELS의 주요 판매 창구였다. 나이스신용평가가 각 증권사 업무보고서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23년 9월말 기준 증권사가 발행한 ELS는 40조1000억원으로 집계된다. 이 가운데 은행신탁(ELT) 형태로 판매한 규모는 25조2000억원으로 62.8%를 차지한다.
ELS, 수수료·운용 수익에 자금조달 효과까지
ELS 시장 상황이 여의치 않자 증권사들의 재무건전성에도 타격이 예상된다.
증권사는 ELS를 고객에 판매하고, 약속한 수익률을 맞추기 위해 채권과 기초지수 선물 옵션을 매입한다. 이것을 '헤지'라고 부른다. 증권사는 ELS를 발행해 판매수수료와 헤지자산 운용수익을 챙길 수 있다.
동시에 자금조달 효과도 늘릴 수 있다. 지수나 주가의 변동성이 크지 않을 땐 투자자가 만기 전 수익금을 조기상환 받고, 그 돈을 다른 ELS 상품에 재투자하는 패턴을 보였기 때문이다. ELS는 한마디로 '일거양득' 노릇을 한 상품이다.
문제는 ELS라는 주요한 자금조달원을 활용하기 힘들어졌다는 점이다. 증권사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우선 투자자가 증권계좌에 넣어두는 예치금(예수부채)이 있다. 또한 ELS와 같은 파생결합증권을 비롯해 회사채, 기업어음(CP), 전자단기사채, 환매조건부채권(RP), 발행어음 등 돈을 시장에서 빌려오는 방식(차입부채)이 있다.
이중 ELS가 차입부채에서 차지하는 규모는 상당하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증권사의 차입부채 가운데 파생결합증권(ELS·DLS)은 24.4%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70%가량이 ELS로 추정된다. 차입부채 중 약 17%가 ELS인 셈이다. PF에 ELS 사태까지 공백…증권사 유동성 '겹악재'
더욱이 증권사들이 현재 처한 유동성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다. 증권업계는 지난해 차액결제거래(CFD) 사태와 영풍제지 반대매매 등 주가조작 사건으로 대규모 미수금이 발생하자 충당금을 쌓아왔다.
올해에도 태영건설 워크아웃 사태로 부동산 PF와 관련해 유동성 관리가 주요 화두다. 연초 금융감독당국은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을 소집해 부실 PF 사업장을 과감하게 정리하라고 당부하는 동시에 넉넉한 충당금을 쌓아 유동성 관리에 매진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자금조달 수단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파생결합증권과 달리 원금보장형으로 만들어진 파생결합사채(ELB)·기타파생결합사채(DLB)가 대표적인 대체재로 꼽힌다.
다만, 상품 구조가 달라 당장 증권사에는 ELS의 공백이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ELB나 DLB는 헤지용으로 수익률이 낮은 국공채에 투자하기 때문에 선물 옵션 등 파생상품으로 헤지하는 ELS와 비교해 조달할 수 있는 자본이 적은 탓이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산업실장은 "ELS 발행량이 급격히 줄면 증권사들이 ELB 등으로 대체하게 될 것"이라며 "ELS를 발행하면 증권사가 자금을 조달하면서 동시에 운용 수익을 가져갈 수 있다. 반면 ELB 등은 운용 수익이 발생하지 않아 증권사의 조달 부담이 커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선 ELS가 주로 대형 증권사의 조달 수단으로 활용되는 만큼 신용등급을 기반으로 발행하는 회사채, 전단채 등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조언도 나온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10개 안팎의 대형사가 전체 발행량의 60~70%를 차지한다"며 "이들은 A1 이상의 우량한 등급을 갖고 있어 다양한 통로로 차입이 가능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