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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시줍줍]③CB제도, 무엇이 달라지나-리픽싱

  • 2024.02.21(수) 06:30

금융위, 전환사채 리픽싱 제도 합리화
정관 활용해 액면가까지 전환가격 낮추기도
앞으론 주총 동의 없으면 액면가 조정 불가

투자자 입장에서 전환사채(Convertible Bond)의 가장 큰 매력은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해 시세차익을 노릴 수 있다는 점이죠. 이 때 중요한 것이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격이 얼마냐는 점인데요. 

시장에서 거래하는 가격(시세)과 전환사채로 확보할 수 있는 가격(전환가격)이 비슷한 수준이라면 굳이 전환사채에 투자한 이후 주식으로 바꾸는 번거로움을 감당할 이유가 없겠죠.

따라서 채권자들이 전환사채 투자에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통상 전환가격은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정해져요. 또 주가가 더 떨어진다면 전환가격도 떨어진 주가에 맞춰 조정하는데 이를 '리픽싱(refixing, 전환가격 조정)'이라고 해요. 

리픽싱을 하게 되면, 전환사채 투자자들은 같은 금액으로 더 많은 주식을 바꿔갈 수 있죠. 따라서 리픽싱은 전환사채에 투자한 채권자에게는 좋은 장치이지만, 전환사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다수의 일반 주식투자자들에게는 잠재적인 물량부담이 커질 수 있는 변수이기도 해요. 

그래서 금융위원회는 지난 1월 23일 전환사채 시장 건전성 제고 간담회를 통해 리픽싱 제도를 손보겠다고 나섰어요. 다수의 상장사들이 무분별하게 리픽싱을 남용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에요. 리픽싱 한도 70%이지만, 실제론 액면가까지 가능 

리픽싱을 통해 전환가격을 낮출수록 채권자가 바꿔갈 수 있는 주식수량은 늘어나요. 그만큼 채권자에겐 유리한 조건이죠. 

앞서 [공시줍줍]①CB제도, 무엇이 달라지나-콜옵션(2월 16일)에서 살펴본 것처럼 최대주주에게 콜옵션 권리를 부여해 시세보다 저렴하게 지분을 늘릴 수 있도록 전환사채를 이용하는 사례가 있었는데요. 이 때 리픽싱을 통해 전환가격을 낮추면 최대주주는 더 많은 주식을 확보할 수 있어요. 

현재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이하 증발공)에는 최초 전환가격의 70%까지 가격을 낮출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최초 발행당시 전환가격을 1만원으로 정했다면, 나중에 주가가 얼마가 떨어지더라도 7000원까지만 조정할 수 있는 것이죠. 다만 주주총회 특별결의나 회사 정관에 전환가격을 더 낮출 수 있는 구체적인 사유나 금액 등을 정하면 예외적으로 70% 미만으로도 하향조정이 가능해요. 

문제는 무분별하게 리픽싱이 이루어지면서 일반 주주들의 지분가치를 떨어트리고 있다는 건데요. 주식전환으로 신주발행주식수가 늘어나면 회사의 총 발행주식수도 늘고 이는 곧 기존 주주들의 지분가치 희석, 이익 침해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실제 정관에 액면가까지 전환가격을 조정할 수 있다고 적어 놓은 기업 사례를 볼까요. 

▷관련공시: 에이프로젠 1월 9일 [기재정정]주요사항보고서(전환사채권발행결정)

에이프로젠 1월 9일 [기재정정]주요사항보고서(전환사채권발행결정)

코스피 상장사 에이프로젠이 지난 1월 9일 올린 전환사채 관련 공시예요. 2023년 3월에 발행한 2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 계약 내용 중 일부를 정정해 다시 공시를 올렸어요. 

공시를 보면 최저 조정가액 근거(정관 제13조)가 적혀 있는데요. 내용은 간단해요. 기본적으로 전환가격을 조정할 땐 증발공 규정(최초 전환가격의 70%까지)을 따르지만, 전환사채의 발행규모가 5조원을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주의 주식소유비율에 따라 전환사채를 발행하거나 구조조정, 경영정상화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을 땐 전환가격을 액면가까지 조정할 수 있다는 뜻이에요. 

에이프로젠의 시가총액은 2000억원대 중반인데요. 따라서 해당 조항은 사실상 회사가 앞으로 발행할 모든 전환사채의 리픽싱을 액면가까지 가능하도록 한 것이나 다름 없어요. 사실상 리픽싱 한도 없어... 소액주주 피해 불가피

현재 에이프로젠의 해당 전환사채 전환가격은 999원인데요. 한때 1500원에서 2000원까지 갔던 회사 주가가 900원대로 내려오면서 전환가격 역시 기존 1532원에서 999원까지 내려왔어요. 

또한 아직 에이프로젠이 갚지 않은 전환사채가 6개나 된다는 점. 이들 모두 시가하락에 따라 전환가격을 낮췄기 때문에 추후 채권자가 요구하면 회사가 발행해야 하는 신주물량이 상당히 늘어난 상황이에요. 

에이프로젠 미상환 주권 관련 사채권에 관한 사항

지난해 9월만 해도 회사 주가가 1400원에서 1800원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전환가격 역시 1500원대를 유지했어요. 심지어 당시 발행한 700억원의 신규 전환사채는 1주당 전환가격이 2005원이었어요. 그만큼 에이프로젠 주가가 크게 올라갔었다는 뜻이죠. 

하지만 불과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 6개 채권의 전환가격은 1100원에서 1000원 아래인 900원대로 곤두박질 쳤어요. 이 때문에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6개 전환사채로 회사가 발행해야 할 신주물량은 1억1412만주였지만 지난 1월 19일 기준 1억9314만주로 70% 증가했어요. 

신주발행가능 물량 1억9314만주는 현재 에이프로젠 총 발행주식수의 72.92%에 달하는 규모예요. 이 정도면 기존 소액주주의 지분가치는 단순한 희석 우려를 넘어서는 수준이죠.  

더군다나 에이프로젠은 회사 정관에 규정한대로 액면가인 500원까지 전환가격 조정이 가능해 사실상 리픽싱 한도가 없는 만큼 향후 전환가격은 더 떨어질 수 있어요. 회사의 주가 상승이 뒷받침 해주지 않는다면 에이프로젠 소액주주들의 피해는 불가피해요. 주총서 '건별' 동의 받아야 70%미만 리픽싱 가능

금융위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리픽싱 제도를 손보기로 했어요. 

지금은 증발공 규정에 따라 최초 전환가격의 70%까지만 조정할 수 있음에도 예외적으로 정관 규정을 이용해 액면가까지 전환가격을 낮추는 사례가 많다고 했죠. 그래서 예외조항을 원천적으로 금지하기로 했어요. 

금융위는 회사 정관에 경영정상화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는 경우 액면가까지 전환가격을 조정할 수 있다고 적어 놓은 규정 자체를 삭제하도록 할 방침이에요. 

아울러 최초 전환가격의 70% 미만으로 리픽싱을 적용하려면 주주총회에서 해당 안건별로 주주들의 동의를 구해야만 가능하도록 증발공 규정을 개정할 예정이에요. 

에이프로젠 사례에 대입해보면, 액면가인 500원까지 전환가격을 내리고 싶다면 총 6개의 전환사채 모두 건별로 주주들의 동의를 받아야 최저한도 아래로 리픽싱이 가능해 지는 것이죠.

금융위 관계자는 "일각에서 전환가격 조정까지 간섭하는 건 과도한 규제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지만 액면가까지 전환가격을 무분별하게 내리면서 소액주주들이 상당한 피해를 보고 있기 때문에 규제하는 것이 맞다"고 강조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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