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기업공개(IPO) 시장에 냉기가 감도는 가운데 공모가를 정하는 수요예측 단계부터 쓴 맛을 보는 일이 부지기수다. 4분기 들어 수요예측을 진행한 24곳 가운데 약 3분의 1이 공모가 희망 밴드를 밑도는 가격을 최종 확정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요예측 결과가 부진하자 상장 계획을 아예 내년으로 미루는 곳도 속출했다.
시장에서는 국내 증시에 대한 투자심리 부진이 공모주까지 얼어붙게 만들었다고 본다. 또한 올해 먼저 상장한 기업들의 공모가 대비 수익률이 저조한 점이 자금 순환에 악영향을 줬다는 분석도 나온다. 주관사와 기업들의 무리하게 몸값을 정한데 따른 수순이라는 지적이다.
밴드 밑돈 공모가 8곳 중 7곳은 4분기 수요예측
올 한해 상장을 했거나 이번 주 상장할 예정인 기업들(스팩(SPAC)·리츠·인프라펀드 제외)의 수요예측 결과를 분석한 결과, 총 77개 회사 가운데 51곳이 희망 공모가 밴드를 웃도는 수준으로 공모가를 확정했다. 18곳은 밴드 내에서 공모가를 정했으며, 8곳은 밴드 하단 아래 수준으로 확정했다.
작년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양상이다. 지난해에는 총 83곳의 기업이 수요예측을 거쳐 상장했는데, 이중 41곳이 밴드상단을 웃도는 공모가를 확정했고 31곳이 밴드 내에서 공모가를 정했다. 13% 정도인 11곳이 공모가를 밴드 하단 미만으로 확정했다.
다만 올해와 작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밴드를 밑도는 최종 공모가를 확정한 곳은 모두 하반기에 쏠려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올해 4분기 중 수요예측을 진행한 회사 24곳 가운데 30% 수준인 7곳이 공모가를 밴드 하단 미만으로 정했다. 지난해 4분기에는 10% 수준에 그친 것과 온도차가 있다.
에스켐은 지난 10월 수요예측 실시한 결과, 공모가를 밴드 하단보다 23.08% 낮은 1만원에 최종 확정했다. 엠오티는 하단 대비 16.67% 낮은 1만7500원에 공모가를 확정지었다.
11월말 수요예측을 한 엠앤씨솔루션의 기관 수요예측 경쟁률은 8.18대 1에 그쳤으며, 최종공모가를 하단보다 18.75% 낮은 가격으로 확정했다. 온코닉테라퓨틱스, 온코크로스도 공모가 하단 대비 각각 18.75%, 27.72% 낮은 공모가로 수요예측을 마무리 했다. 12월 초 수요예측을 진행한 듀켐바이오, 쓰리에이로직스도 각각 밴드 하단대비 34.96%, 29.94% 밑도는 수준으로 공모가를 결정했다.
계엄 여파+새내기주 수익률 저조에 투심 악화
시장에서는 공모주 부진 현상의 배경으로 국내 증시의 자금이탈을 첫번째로 꼽는다. 코스피지수와 코스닥지수는 4분기 들어 12%, 7%씩 하락했다. 지수는 8월 블랙먼데이로 저점을 찍은 뒤에도 소폭 되돌림을 보였지만 비상계엄 사태 이후인 12월초 저점을 새로 썼다. 당시 원·달러 환율 상승 등으로 국내 증시 매력도가 떨어진 가운데 12월초 수요예측을 진행한 곳들도 직접적인 타격을 받았다는 분석이다.
상반기에 먼저 상장한 새내기주들의 수익률 악화도 투자심리에 영향을 줬다. 상장 직후 공모주 수익률이 고꾸라지자 전문투자자들이 차익실현에 나서지 못해 자금이 묶이게 됐다는 것이다. SK증권에 따르면 12월 16일 종가 기준으로 올해 신규 상장한 기업들의 단순 평균 수익률은 -18%를 기록했다. 100% 이상의 수익률을 달성 중인 기업은 우진엔텍과 위츠 뿐이다.
이경준 혁신IB자산운용 대표는 "수요예측에서 밴드 상단 초과한 결과가 나온다는 건 이 수요를 받쳐주는 기관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렇게 폭탄돌리기를 하다보면 물린 기관들이 많아지게 된다"고 말했다.
특히나 올해는 프리 IPO 단계에서 투자한 벤처투자 기관들도 보호예수를 꺼리는 모습이 두드러졌고 이들의 빠른 '손절'이 공모주 수익률을 압박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전문투자자 가운데 보유물량 전량을 보호예수로 걸지 않고 일부는 바로 팔 수 있게끔 남겨두는 모습"이라며 "상장만 하면 빨리 정리하고 나가겠다는 곳들이 작년보다 많았다"고 설명했다.
공모주 배정에서도 기관들이 상장 후 일정기간 팔지 않기로 약속하는 의무보유 확약 참여도 저조했다. 에스켐(4.61%)과 온코닉테라퓨틱스(10.70%)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기업들의 의무보유확약율은 1% 미만이다. 엠앤씨솔루션은 의무보유확약을 건 기관이 한 곳도 없었다.
하반기 투자심리 악화가 주관사와 공모기업이 공모가 밴드를 적정히 산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그간 무리하게 비싼 몸값을 매긴 데 따른 불가피한 '후폭풍'이라는 설명이다.
나승두 SK증권 연구원은 "하반기와 달리 상반기에는 밴드 상단 혹은 상단 초과 일색이었다"라며 "이러한 부분들이 결국 고평가 논란으로 이어졌고, 올해 증시가 전반적으로 부진한 와중 차익 실현 매물까지 더해지며 부진한 수익률을 기록했다"고 봤다.
연말 IPO 시장 분위기가 좀처럼 살아나기 어려워 보이는 가운데 상장을 준비하던 기업들은 일단 내년으로 일정을 미루고 있다. 케이뱅크와 SGI서울보증 등 조단위 대어 뿐 아니라 11~12월 상장을 목표하던 동방메디컬, 미트박스글로벌, 아스테라시스, 데이원컴퍼니, 삼양엔씨켐, 모티브링크, 아이에스티 등이 내년 초로 상장 스케줄을 미뤘다. 이경준 대표는 "내년 1월에는 상장을 하려다 철회하고 패자부활전에 나서는 기업들이 많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