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30만원 이상 온라인 결제에 공인인증서 의무 사용을 폐지한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전자결제 시장이 꿈틀대고 있다. 모바일메신저 '카카오톡'을 운영하는 카카오가 금융사들과 손잡고 시장 진출을 선언하면서 금융과 정보기술(ICT) 융합을 통한 '빅뱅'이 현실화되는 모습이다. 전자결제를 시작으로 금융 서비스 전반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전망이다. 달라진 환경에 대응하는 금융권 움직임을 살펴보고 여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은 없는지 짚어본다. [편집자]
회사원 김모씨는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켜고 얼마 전에 계좌를 튼 머니마켓펀드(MMF)의 투자 수익률을 체크한다. 은행 사이트나 별도 앱을 여는 게 아니라 모바일메신저 '카카오톡'을 두드려 확인한다.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차트가 주기적으로 날아오기 때문에 해당 메시지를 여는 것 만으로 수익률을 파악할 수 있다.
카톡을 연 김에 택시를 부른다. 집과 회사의 위치를 설정하고 호출하면 집 앞까지 찾아온다. 택시비는 이미 카톡으로 결제했다. 출근하면서 친구 생일 선물을 카톡 쇼핑몰을 통해 구입한다. 전에는 30만원 이상을 사면 공인인증서 등 복잡한 인증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이제는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결제를 끝낼 수 있다. 김 씨는 카톡으로 쇼핑 뿐만 아니라 음식점을 예약하고 영화표나 항공권도 예매한다.
가상으로 꾸며본 미래 생활상이지만 그리 먼 얘기는 아니다. 전자결제 등 일부 금융 서비스가 카카오톡에 들어올 채비를 하고 있어서다. 카카오는 내달부터 은행 및 카드사와 손잡고 소액 송금이나 신용카드를 통한 간편결제를 서비스할 계획이다. 중국 텐센트가 운영하는 모바일 메신저 '위챗'은 이미 작년부터 '리차이퉁'이란 온라인 재테크 상품을 선보였고 쇼핑은 물론 택시 호출이나 영화·항공권 예매도 시작했다. 위챗이 먼저 걸어간 길을 보면 카카오톡의 발전 방향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카카오..이체부터 카드결제까지
위챗을 비롯해 중국 알리바바와 미국 이베이, 아마존 등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업체들이 금융 영역으로 사업을 넓히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체 결제 수단을 갖고 있다는 점. 카카오가 내달 선보일 가칭 '카카오간편결제'란 서비스를 금융업 진출의 신호탄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카카오는 BC·신한·KB국민 등 9개 카드사와 손잡고 내달부터 카카오톡을 통해 결제 서비스를 시작한다. 기존 결제 방식과 다른 것은 공인인증서를 통한 본인인증 과정이 필요없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온라인에서 30만원 이상 물건을 사고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려면 공인인증서를 반드시 입력해야 했다. 카카오간편결제는 번거로운 절차를 건너 뛰고 간편하게 물건값을 계산할 수 있다. 신용카드 정보를 처음 한번만 등록하고 물건값을 치를 때마다 비밀번호만 입력하면 된다.
카카오간편결제는 카카오 선물하기 등 부가 서비스들에 도입되며 G마켓, 11번가 등 외부 쇼핑몰 사이트에도 적용될 전망이다. 지금의 온라인 신용카드 결제나 휴대폰 소액 결제(다음달 통신 요금에 반영되는 방식), 계좌 이체 등과 더불어 새로운 결제 수단이 추가되는 것이다.
카카오는 이와 별개로 국민은행 등 15개 은행과 손잡고 카카오톡으로 소액을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는 '뱅크월렛 카카오'도 준비하고 있다. 내달 나올 이 전자지갑은 카카오톡에 연락처가 등록된 사람끼리 카카오 계좌에 있는 돈을 하루 최대 10만원까지 송금하는 시스템이다. 서비스 초기에는 친구들과 경조사비 정도를 주고 받는데 이용되겠지만, 향후에는 카카오간편결제처럼 결제 수단으로 쓰임새가 확대될 전망이다.
◇모바일메신저, 금융 플랫폼으로 급성장
카카오측은 자사의 결제 시스템을 바라보는 외부의 관심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다. 서비스를 준비하는 단계임을 강조하면서 업계에 미칠 파장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리고 있다. 자칫 자사 결제를 우대하고 기존 협력사를 차별 대우한다거나, 카카오톡의 강력한 플랫폼을 내세워 '문어발식' 확장을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살 수 있어서다.
카카오측이 스스로 큰 의미를 두고 있지 않지만 업계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다르다. 우선 카카오톡 이용자가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3720만명) 가운데 94%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은 그 자체로 휘발성이 있다. 모바일 시대를 맞아 스마트폰이 일상 생활에서 필수 기기로 자리잡은 만큼 이용자 수가 월등히 많은 카톡의 신사업 진출은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이미 카카오톡은 국내 메신저는 물론 모바일 게임과 상품권 시장을 차례로 장악하면서 세력을 키우고 있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면 카톡 같은 모바일 메신저가 전자상거래와 금융을 아우르는 강력한 플랫폼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위챗의 경우 '텐페이'라는 결제 서비스를 내놓고 쇼핑몰이나 여행사, 부동산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카카오도 최근 택시 호출 서비스를 검토하는 등 사업 외형을 키우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카카오는 국내 2위 포털 다음과 합병을 앞두고 있다. 다음의 1600여명에 달하는 인력을 일시에 확보, 다양한 금융 서비스 개발이나 가맹점 확보에 나설 수 있다. 다음이 포털 서비스를 통해 오랫동안 쌓아온 사업 노하우를 접목할 수 있다. 잠재력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신종 금융 서비스 눈앞..시장 재편 예고
마침 금융당국이 금융업을 둘러싼 규제를 하나둘씩 걷어내면서 카카오를 포함한 비(非)금융업체들에 기회로 작용하고 있다. 금융업은 높은 규제 장벽으로 비금융 업체의 진출이 사실상 막혔던 곳이다. 굳게 닫혔던 문이 열리면서 국내는 물론 글로벌 ICT 기업들이 들어올 여지가 생겼다. 국내에선 카카오를 비롯해 삼성전자 등 제조사와 이동통신사들이, 해외에선 이베이, 알리바바, 아마존 등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
이들이 진출하면 금융시장의 경쟁 구도가 재편될 가능성이 크다. 현금 등 전통적인 결제 수단 사용이 축소되고 있고, 스마트폰과 모바일메신저의 영향력이 날로 확대되는 가운데 빅데이터 등 첨단 기술로 무장한 곳들의 등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전엔 볼 수 없었던 금융상품을 개발한다거나 마케팅에 활용할 경우 파급력이 클 전망이다.
실제로 글로벌 컨설팅 전문기업 액센츄어는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를 통해 미국에선 오는 2020년까지 ICT기업이 기존 은행 시장을 30% 가량 잠식할 것으로 전망했다. KDB산업은행도 최근 보고서를 통해 "국내 시장은 규제 등으로 비금융기관의 급격한 시장점유율 확대 가능성은 낮으나 최근 지급결제 분야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강화하는 추세"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은행이나 카드사 등 기존 금융권은 최근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편리함'으로 무장한 ICT기업들의 서비스가 강력한 경쟁 상대로 부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금융+ICT' 융합 서비스의 등장이 기존 금융업에 오히려 호재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