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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인수 트라우마'가 낳은 10조 베팅

  • 2014.09.19(금) 15:58

지난 2010년 11월 16일. 현대차그룹 양재동 사옥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현대건설 인수를 자신했던 현대차그룹이었다. 시작부터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할만큼 인수가 확실해 보였던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임에서 졌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충격은 더욱 컸다. 오전부터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가 현대그룹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때까지만해도 현대차그룹은 "설마…"라는 반응이었다. 
 
결과 발표시간이 오후 1시30분에서 오전 11시로 당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현대차그룹은 당황했다. 지금까지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었다. 불안감이 양재사옥을 엄습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현실이 됐다. 
 
지난 2010년은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과 현대차그룹에게는 잊을 수 없는 한 해다. 옛 현대그룹의 근간인 현대건설을 되찾겠다는 명분 하에 현대그룹과 인수경쟁을 벌였다. 현대그룹은 당시 그룹의 사활을 걸고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이에 비해 현대차그룹은 상대적으로 느긋했다. 재계 2위의 현대차그룹이다. 현대건설 인수 자금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현대그룹은 힘들어했다. 현대그룹을 제외한 그 어느 누구도 현대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지 않았다.
 
당시 시장에서 평가한 현대건설의 인수가격은 4조원대였다. 현대차그룹은 당초 현대건설 인수액을 4조원대 후반으로 잡았다. 이만하면 넉넉하다는 생각이었다. 현대차그룹은 자금 사정이 어려운 현대그룹이 4조원을 만드는것도 버거울 것으로 여겼다.
 
 
본입찰 직전, 현대차그룹은 또 한번의 여유를 부렸다. 최종 가격을 써내기 직전 정몽구 회장은 가격을 당초 인수TF팀이 올린 것보다 더 높여 적었다. 5조1000억원이었다. 현대그룹을 금액으로 완벽하게 압도하겠다는 생각이었다.
 
M&A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다. 특히 상대방의 가격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쉽지않다. 그래서 대형 M&A의 경우 인수기업들의 정보라인은 치열하게 물밑 작업과 정보 수집 작업을 벌인다.
 
현대차그룹은 계열사들과 각종 라인을 동원해 현대그룹의 가격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내린 최종 결론이 4조원대 후반이면 너끈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 회장은 그 보다도 더 높여적었으니 인수를 자신할만도 했다.
 
하지만 정 회장과 현대차그룹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현대그룹은 현대차그룹의 5조1000억원보다도 많은 5조5000억원을 적어냈다. 현대차그룹은 깜짝 놀랐다. 분명 현대그룹의 자금사정은 넉넉치 않았다. 그런데 5조5000억원을 베팅했다.
 
당시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정말 아무런 방비 없이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며 "현대그룹의 5조5000억원 소식을 듣는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고 말했다. 그만큼 현대그룹의 '통 큰 베팅'은 현대차그룹에게 충격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현대건설은 결국 현대차그룹의 차지가 됐다. 현대건설을 둘러싼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간의 치열했던 경쟁은 대우조선해양 인수전과 함께 국내 M&A 역사에 남을 만한 사건이었다.
 
현대차그룹은 10조5500억원에 한전 부지를 낙찰받았다. 시장 예상 가격의 2배가 넘는 금액이다. 업계는 현대차그룹의 '오버 베팅'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시장도 놀랐다. 지난 18일 한전 부지 인수에 참여하는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의 주가는 급락했다. 하루동안 시가총액 8조4000억 원이 날아갔다.
 
일각에서는 현대차그룹이 무리수를 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5000원에 살 수 있는 물건을 1만원에 산다고 나섰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현대차그룹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반응이다. 그룹의 현금성 자산이 30조원에 달하는 만큼 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현대차그룹이 10조원이 넘는 금액을 베팅하기까지는 많은 고민과 계산을 했을 것이다. 금액보다 그룹의 위상을 감안한 상징적인 측면과 미래가치를 계산에 넣은 끝에 나온 결정일 게다. 그럼에도 너무 많은 금액을 써냈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다.
 
문득 지난 2010년 현대건설 인수 당시의 현대차그룹 모습이 떠올랐다. 현대그룹에게 일격을 당했던, 그래서 망연자실했던 현대차그룹의 모습에서 일정 부분 이번 베팅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 듯 싶다.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현대건설 인수전 당시의 기억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줬다"며 "삼성과의 경쟁인 만큼 밀리면 안된다는 의지가 강했다"고 말했다.
 
현대차그룹의 이번 베팅은 현대건설 인수전 당시의 트라우마를 지우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현대차그룹에게 남은 숙제는 10조5500억원의 베팅이 '무모한' 베팅이 아니라 '통큰' 베팅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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