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이후 자신의 생활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평일 아침이지만 더 이상 회사에 출근하기 위해 이른 시간부터 복잡한 길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 아침 9시 무렵 느지막이 일어나 집안을 어슬렁거리며 아침식사를 한다. 현역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아침 드라마를 보며 여유를 즐긴다. 헬스클럽에 나가 운동을 하고 친구를 만나 점심을 먹는다.
오후에는 다른 친구를 만나 커피숍에서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실내 골프나 걷기와 같은 새로운 운동을 시작한다.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와 드라마를 보고 8시, 9시 뉴스를 잇따라 시청한다. 다음 날도 아침에 일찍 나갈 일이 없으니 애국가가 나올 때까지 심야 프로그램을 즐긴다. 바쁜 회사 일에 쫓기고 있는 현역 직장인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삶이야 말로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을 20년 이상 해야 한다고 상상해보라. 헬스클럽이 쉬거나 만날 친구가 없다면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 휴식이란 일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빛을 발한다. 365일 매일 휴일이라면 금새 지루해지고 말 것이다.
사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은퇴 이후의 삶을 ‘휴식’의 개념으로 상상한다. 하지만 막상 은퇴를 경험한 이들은 이러한 상상과는 격차가 크다. 오히려 은퇴 이후의 삶을 ‘궤도가 없는 미래’와 같이 막막한 불안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은행에서 40년을 근무하고 나온 정년 퇴직자는 “퇴직은 철봉에 매달려 있다가 떨어져 멍한 상태가 되는 느낌”이라고 밝혔다. 백화점에서 근무했던 한 퇴직자는 “일 년을 놀다가 창업 강의 같은 것을 들으러 다녔는데 상실감이 컸다”고 한다.
심리 전문가들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은퇴 이후 심리적으로 4단계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첫째는 ‘거부 단계’로, 은퇴가 신체적·정서적·사회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부정하려는 단계이다. 이 시기에는 은퇴의 긍정적인 측면을 부정하고 분노나 두려움 같은 내면의 감정을 억누른다.
둘째 ‘우울 단계’이다. 직업 역할이 없어진 데 비애를 느끼고 의기소침해지는 단계이다.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것이 별로 없다며 후회하고 앞으로 닥칠 여러 문제에 압도되어 우울증에 빠지는 시기이다.
셋째는 ‘분노 단계’로, 주위의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일했던 회사나 조직이 퇴직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잘 도와주지 않았다고 불평하는 단계이다. 배우자가 직업이 있는 경우에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화를 내면서 거부할 수도 있다. 은퇴한 자신에게 동정심을 가져주고 심리적으로 지지해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마지막은 ‘수용 단계’로 은퇴한 현실을 인식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워보며 은퇴에 따른 도전을 받아들여 은퇴에 맞는 일상적인 활동을 시작하는 단계이다. 이러한 심리적 단계가 주는 고통은 사람에 따라 몇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으며 그 아픔은 상상 이상 크다는 게 경험자들의 얘기다.
거부나 우울, 분노와 같은 은퇴 충격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구조조정이나 어떤 상황에 의한 강제적 은퇴가 많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은퇴의 90% 이상이 이 같은 강제적 은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다보니 은퇴 자체가 개인에게는 상당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은퇴 이후 삶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강제적 은퇴를 당하기 앞서 ‘자발적인 은퇴’를 적극 준비하는 것이다. 현역시절부터 재무적으로나 비재무적으로 은퇴 이후의 삶을 계획하고 준비한다면 은퇴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은퇴 이후 필요한 생활비 등을 가늠해 보고 미리 연금을 충분히 확보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