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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총투어]삼성전자가 증명한 전자투표 필요성

  • 2019.03.21(목) 09:01

쇄도한 주주 질문에 3시간 걸린 삼성전자 정기주총
모든 안건 박수로 통과.. 사전설명 불충분했던 이사선임
삼성전자가 만든 노트북·휴대전화로 전자투표 가능해야

자본시장이 발달한 나라에선 주주총회를 '자본주의의 축제'로 부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주총은 엄숙·경직이란 단어가 더 어울립니다. 그동안 국내 언론의 주총 관련 보도 역시 극히 예외적 이슈를 제외하면 형식적 결과 전달에 그쳐왔습니다. 주총 현장을 보다 생동감 있게 전달하기 위해 기자가 적접 소액주주의 시선으로 주총에 참석, 경험을 공유하는 [주총투어]를 연재합니다. 우리나라 주총 문화가 조금씩 나아지는데 작은 발걸음이 됐으면 합니다. 지난 14일 현대글로비스에 이어 두 번째 이야기는 20일 정기주총을 개최한 삼성전자입니다. [편집자]

20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빌딩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에 입장하기 위해 주주들이 줄을 서 대기하고 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움직였다. 삼성전자가 지난해 주식 1주를 50주로 쪼개는 액면분할을 실시하면서 예년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주총에 참석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주총 시작 시간보다 40분 앞서 도착한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빌딩 5층 다목적홀은 이미 적지 않은 주주들이 공항 출입국 심사를 기다리듯 줄을 맞춰 대기하고 있었다. 다행히 일찍 서두른 덕분에 5분 남짓만 기다리고서 주총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주총장 곳곳에 배치한 안내직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총장 안에 자리한 의료진, 주총장에 입장하지 못할 주주들과 취재진을 위한 방송중계시스템 등 삼성전자의 주총 준비는 세련되고 치밀했다.

주총 의장을 맡은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부회장)가 인사말을 시작한 시점은 정확히 오전 9시 정각이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오프닝 시각. 그러나 준비된 시나리오는 거기까지였다.

주총 시작 이후에도 계속해서 입장하는 주주들 때문에 약 500명 정원의 주총장 뒤편에는 10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이들이 주총 내내 어수선하게 서서 발언을 경청했고, 서있을 자리마저 부족해 주총장 밖에서 입장하지 못한 주주들도 적지 않았다.

오전 9시 정각에 시작한 삼성전자의 50번째 정기주총은 정오를 넘긴 12시 2분 김기남 대표이사의 폐회선언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별 다른 논쟁거리가 없어보였던 삼성전자 주총이 3시간을 넘긴 건 안건마다 주주들의 질의가 쇄도했기 때문이다.

이날 주총장에서 쏟아진 주주들의 질의는 회사의 사업방향에 대한 질의와 배당·이사선임 등 안건에 대한 찬반의견이 주를 이뤘지만, 주총 진행방식에 대한 의사진행발언도 적지 않게 쏟아졌다.

"액면분할로 주주들이 많을 것이란 점을 몰랐나." “아침부터 마산에서 주총 참석하려고 올라왔는데 한 시간이나 밖에 서 있어 기분이 좋지 않다.”

주주들의 질의가 이어지가 김기남 대표이사는 "장소가 협소해 불편을 드린 점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며 "내년에는 보다 넓은 시설에서 주주 여러분들 모실 수 있도록 하겠다"고 거듭 사과했다.

이날 삼성전자 주총을 취재한 많은 언론도 협소한 장소 문제를 지적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삼성전자라 해도 주총 참석 인원을 정확히 예측하는건 어렵다. 오히려 주총 장소는 체육관처럼 큰 건물을 통째로 빌린다면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는 문제로 보였다.

김기남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20일 오전 삼성 서초사옥에서 열린 삼성전자 주주총회에서 의장 인사말을 하고 있다. /이명근 기자 qwe123@

기자실이 아닌 주총 현장에서 느낀 이날 삼성전자 주총의 문제는 진행 방식이었다.

삼성전자 주총에 참여한 주주들은 영업보고서, 주총안건설명서와 함께 투표용지를 받았다. 하지만 주총장 어디에도 투표지를 취합하는 장소는 보이지 않았고, 그 많은 안내직원 누구도 투표용지를 어떻게 전달하면 되는지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모든 안건은 박수로 통과됐다.

물론 상장회사 주총에서 첨예한 대립이 있는 안건이 아니고선 현장에서 찬·반 투·개표를 실시하는 일이 많지 않다. 특히 삼성전자와 같은 대형 상장사는 기관투자가들이 많은 탓에 위임장을 통한 의결권 행사로 이미 안건 표결 전 찬·반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 때문에 주주들 가운데 표결처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 주총현장에 참석한 주주들을 대상으로 반대 의견이 없는지 확인하고 박수로 안건을 통과시키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안건마다 얼마가 반대했는지는 알려주는 절차는 필요하다. 더군다나 삼성전자는 주총 전 4곳(캐나다연금, 캘리포니아교직원연금, 플로리다연금, 브리티시컬럼비아투자공사)의 해외기관투자가들이 박재완·김한조 사외이사 및 감사위원 선임 건에 사전 반대의결권을 행사한 상황이었다.

설령 현장 참석자들이 보유한 의결권이 안건 통과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지라도 최소한 ‘반대표가 몇 표 나왔지만 가결 요건은 충족했다’는 설명이 없었던 대목은 아쉽다.

이날 삼성전자 주총에서 나타난 미세먼지 속 주주행렬, 박수로 의결하는 안건 처리의 모습은 자연스레 전자투표를 도입하지 않은 아쉬움으로 이어진다.

삼성전자가 주총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주주들을 위해 미세먼지를 제거해 줄 수는 없다. 또 첨예한 대립이 나타나지 않는 안건까지 모두 투·개표를 진행하는 것도 시간낭비다.

그러나 자사에서 만든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이용한 전자투표로 보다 다양하고 손 쉽게 주주들이 의사표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지금 당장이라도 결정할 수 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총의 기억이 남아있는 삼성으로선 전자투표가 고민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전자투표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세계 최고의 IT기업이라 자부하는 삼성전자가 전자투표를 외면하는 건 당당하지 않은 모습이다.

삼성전자가 앞으로 전자투표를 도입하는 결정을 내리더라도 보다 원활한 주총 진행을 위해선 바꿔야할게 더 있다. 지금보다 더 충실하게 사전 안건 설명을 해줘야한다.

이날 주총에 참석한 복수의 주주들은 사외이사·감사위원 후보자와 관련 “왜 이 사람들을 후보자로 선정했는지 설명하지 않고 약력만 제시했다”고 지적했다.

기자가 주총 전에 받은 주총소집통지문에서도 이번 주총에서 재선임되는 박재완 사외이사 후보가 그동안 회사를 위해 어떠한 활동을 했는지, 신규 선임될 안규리·김한조 사외이사 후보의 경력 중 어떠한 점이 삼성전자 사외이사로 활동하는데 도움된다고 판단했는지 설명하는 문구는 없었다.

자금력이 풍부한 기관투자가들은 의결권자문기관에게 수수료를 주고 안건 분석을 의뢰하지만, 그럴 수 없는 수많은 소액주주들은 이날 주총에서 박재완·안규리 후보자의 자격을 둘러싼 질의를 쏟아냈다. 주총 전 충실한 안건 설명을 해주는 것은 이러한 소액주주들에게 삼성전자가 먼저 다가가는 방법이다.

삼성전자는 주총이 끝난 이후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과문을 올렸다.

“내년 주총에서는 장소와 운영방식 등 모든 면에서 보다 철저히 준비해 주주님들께 불편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일 삼성전자가 정기주주총회 직후 홈페이지에 게시한 사과문.

삼성전자는 내년 주총에서 장소와 운영방식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거듭 얘기하지만 많은 주주와 언론이 제기한 장소 문제를 해결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운영방식을 해결하는 건 장소 섭외보다 훨씬 더 심도있는 고민과 철학이 필요한 대목이다.

이날 삼성전자 주총에서 인상적이고 감명을 받은 장면도 많았다.

전형적인 '주총꾼'으로 보이는 몇몇 이들의 발언이 있었지만 삼성전자는 인내심있게 주주 발언권을 보장했으며, 몇 가지 질문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주주 질의에 간략하게나마 답을 하고자했다.

무엇보다 안건 심의에 들어가기 전 주요 사업부문을 책임지는 대표이사들이 사업계획을 설명하고 주주들의 질문을 받는 모습은 다른 대형 상장회사 주총에선 경험하기 어려웠던 삼성전자만의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럼에도 아쉬운 점을 지적하는 건 우리나라 주식시장을 대표하는 삼성전자이기 때문이다. 많은 대기업들이 외면하고 있는 전자투표를 삼성전자가 먼저 도입하고, 주총 전 충실한 안건 설명을 통해 삼성전자를 응원하는 소액주주들에게 다가가는 모습. 이러한 주총문화 개선에 삼성전자가 신호탄을 쏘아 올리길 기대한다.

(기자는 삼성전자 주식 8주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정기주총 주주명부 폐쇄일 기준으로 의결권 2주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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