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이 있으니까 왔죠."
"30년을 무주택자로 살아서 가점은 충분합니다."
"청약 떨어지면 적당한 시점에 그냥 사면 되죠"
강남 견본주택에서 만난 방문객들의 이같은 답변에 종종 깜짝 놀라곤 한다. 시세보다 싸다곤 하지만 9억원을 훌쩍 넘는 분양가에 중도금 대출 여부나 청약 가점에 전전긍긍하는 보통의 사람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대부분 현금 여력은 충분했고 고가 전세에 살며 청약 통장을 아껴둔 덕에 청약가점까지 높다. 이들은 '로또'로 보이는 아파트에 묵혀둔 청약통장을 그제서야 꺼내들며 '투자'를 했다.
최근 1년여 간 강남권 견본주택에서 만나 인터뷰했던 부자들의 이야기를 정리해봤다.
(feat.현금은 충분해요)
강남에서 분양하는 아파트들은 분양가가 3.3㎡(1평)당 5000만원에 달해 중도금 대출이 안 되는 9억원을 넘기곤 한다.
계약금은 본인 신용 대출 등으로 납부한다고 해도 분양가의 60~70%에 달하는 중도금은 현금으로 들고 있어야 하는 셈이다.
예비 청약자들에게 '중도금 대출이 안 되는데 괜찮으시냐'고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문제없다"는 식의 답변이 돌아오곤 했다.
분양가 13억100만~16억6400만원에 달하는 '래미안 라클래시(9월20일)'의 견본주택서 만난 예비 청약자들도 "분양가가 다소 비싸다"는 얘기는 할지언정 "그래서 못 산다"는 걱정을 하는 이는 없었다.
단지 위치도를 한참 보던 50대 여성(삼성동 거주)은 "대출은 필요 없는데 이미 강남에 집이 두 채 있어서 유주택자라 청약이 안 된다"고 말했다. 청약 자격이 안 되는데 견본주택엔 왜 왔냐고 묻자 "다음 주 역삼 센트럴 아이파크 견본주택도 가보고 둘 중 괜찮은 곳을 급매물로 잡든지 그냥 입주할 때쯤 가서 살 생각"이라고 답했다.
입주 시점에 가격이 잔뜩(최소 4억~5억원 예상) 오른 매물이어도 '그냥 사겠다'는 것이다. 여기엔 입주시점인 2년여 후 프리미엄을 얹더라도 투자가치가 충분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같은 날 청약 상담 대기석에서 만난 50대 B씨도 "현금은 충분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B씨는 "일단 강남에서 분양하는 족족 청약을 넣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청약 경쟁률이 높은데 분양가 상한제를 도입하면 경쟁률이 더 세질 것"이라며 "래미안라클래시 떨어지면 다음 주 역삼 센트럴 아이파크 청약하는게 B플랜이고, 그것도 안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강남 아파트에 청약하는 게 C플랜"이라고 덧붙였다. 실제 그 다음 주 열린 '역삼 센트럴 아이파크(9월27일)' 견본주택에서 B씨를 다시 마주치기도 했다.
(feat.대 잇는 부자)
강남 견본주택에 북적이는 인파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사람들이 다 무주택자라는 것인가?' 였다.
앞서 정부는 청약 시장을 실수요자 위주로 개편하기 위해(9‧13대책의 후속대책) 지난해 12월 11일 이후 유주택자의 청약을 차단했다.
추첨제 분양 물량 중에선 25%만 당첨 기회가 있는데 처분조건부 각서를 써야 하고 청약과열지역, 투기과열지구에선 과거 5년 이내 당첨이력이 있어서도 안 된다. 분양권 소유자도 유주택자로 본다.
'현금이 충분하다'는 강남 사람들이 어떻게 청약 자격(무주택)을 충족할 수 있는 걸까.
'서초그랑자이(6월28일)' 견본주택에서 만난 50대 C씨(강남 거주)는 그 이유 중 하나로 '전세'를 꼽았다. 강남에서 30년째 부동산 중개업소를 하고 있다는 C씨는 "전세 아파트에 살면서 청약 통장을 아끼는 사람도 더러 있다"며 "세금 문제도 있지만 요즘은 로또 아파트가 워낙 많이 나오지 않느냐"고 말했다.
인근에 위치한 '래미안서초에스티지S' 전용 111㎡의 전세가격이 9억~11억원 수준이다. 이런 고가 전세에 살면서 아껴둔 통장으로 로또 청약을 하고, 당첨돼서 수억원의 시세차익을 보며 재산을 불리는 식이다.
장재현 리얼투데이 리서치본부장은 "부모 대에 집이 여러채 있는 집은 굳이 집을 사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고가 전세에 사는 이들이 꽤 된다"며 "이런 사람들이 현금도 많고 청약가점도 높을 수 있다"고 귀띔했다.
이렇게 장만한 집 혹은 재산은 대를 이어 자녀들에게 이전된다. 견본주택 취재과정에서도 심심치않게 봐온 모습이다.
유니트를 관람하기 위해 줄 서 있던 60대 D씨(선릉 거주)는 차곡차곡 모아둔 청약 가점을 이용해 당첨이 되면 '증여'를 해 줄 생각을 갖고 있다. 청약 가점이 70점대 후반이라는 D씨에게 '당첨 되실 거 같은데 좋으시겠어요'라고 말하자 "이게 어디 내거냐, 아들 줄 생각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강남권 견본주택에서 눈에 띄는 20대 청년도 만났다. 그의 답변도 인상적이었다.
'래미안 라클래시' 견본주택에서 만난 E씨(잠실 거주)는 "아버지가 대신 가서 청약 점수(70점 중반대)로 당첨될 수 있는지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고 말했다. 청약이나 분양가 등에 대해 이것저것 묻자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면서도 "제 돈 벌어서는 못 살 것 같다"고 답했다.
(feat. 도우미 동선 고려)
견본주택에서 자주 들리는 불만 중 하나가 옵션 가격이다.
무상 옵션에 비해 유상 옵션 품목이 지나치게 많거나, 옵션 가격이 비싸 실제 분양가는 더 높은 게 아니냐는 지적과 불만이 종종 나온다.
물론 강남도 다르지 않지만 대부분 옵션 가격보다는 옵션 품목을 더 중시하는 분위기였다.
역삼 센트럴 아이파크에서 만난 50대 F씨(역삼 거주)는 입주자 모집공고를 한 참 들여다보다가 "주방 타일이나 마감재가 고급스러웠으면 좋겠다"며 "유상옵션 필요한 건 다 할 생각인데, 제품이 맘에 안 들면 아는 인테리어 업체에 따로 맡길까도 생각중"이라고 말했다.
그의 남편 G씨에게 옵션 가격의 적정성에 대해 묻자 "가격은 자세히 안 봐서 모르겠다"며 "다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가족 구성원이 아닌 가사 도우미 등의 동선을 고려해 옵션을 만들고 또 선택하는 이들도 있었다. '래미안 리더스원(작년 10월31일)'엔 거실에서 안방으로 바로 이어지는 '터닝 도어'를 선택할 수 있었다.
안내 직원은 "가사 도우미 등이 일할 때 방에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유니트를 둘러보던 중년층의 여성 두 명이 "불편했는데 잘 됐다" 등의 얘기를 주고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