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청소년들끼리 하는 대화를 듣다보면 이해하기 힘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들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낸 용어들이 많거든요.
올해는 어른의 세계에도 '신조어'가 판을 쳤습니다. 특히 부동산 시장에서요.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못지않게 부동산 시장도 최근 몇 년간 집값 상승과 규제로 혼돈에 빠졌는데요. 연일 사회적 화두로 오르며 관심이 쏠리는 만큼 신조어가 우후죽순 생겨났습니다.
이같은 신조어에는 현 부동산 시장의 상황과 수요자들의 처지 등이 반영돼 있는데요. 올해 자주 쓰인 부동산 신조어를 종합해보고 어떤 배경에서 나오게 됐는지 돌아봤습니다.
현 정부는 24번의 부동산 대책을 쏟아냈는데요. 여전히 서울을 중심으로 주요 지역의 집값은 과열의 불씨가 꺼질 줄을 모릅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중위매매가격은 2018년 12월 6억8749만원, 2019년 12월 7억9758만원, 2020년 11월 8억5834만원으로 매년 상승세입니다.
거의 1년에 1억원씩 오르는 셈이니 주택 매수 대기자들의 불안감도 커질수 밖에 없겠죠.
'패닉바잉'이라는 신조어는 이런 배경에서 출현했습니다. 집값 상승 불안감이 3040을 중심으로 공황적으로 주택 매수를 하는 현상인데요. 이미 2021년 집값도 각종 연구기관이나 전문가들이 '상승'으로 입을 모은 만큼 패닉바잉도 이어지는 분위기 입니다. ☞관련기사 [2021 부동산이 궁금하다]억! 하반기 집값 더 오른다고요?
집을 살 때는 '영끌'하는 이들이 자주 눈에 띕니다.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대출을 받아 '영혼까지 끌어모은다'는 뜻의 신조어죠.
청약 시장에 대한 실망감도 신조어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집값이 너무 올라 분양가 규제를 받는 신축 분양 아파트로 눈을 돌리는 수요자들이 많은데요. 청약에 당첨만 되면 '로또'라는 인식이 강한 데다 서울 등 수도권 주택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라 경쟁이 어마어마합니다. 그러자 청약가점이 낮거나 현금이 부족한 청년들을 중심으로 청약을 포기하는 이들을 일컫는 '청포족'이라는 신조어가 나왔습니다. 비슷한 이유로 '청약은 무슨, 피(프리미엄) 주고 사'라는 뜻의 '청무피사'라는 용어도 있고요.
신축 아파트를 사거나 분양받기 힘든 이들은 오래된 구축 아파트에 들어가서 재건축·재개발이 진행될 때까지 몸으로 때운다는 '몸테크'라는 신조어도 자주 쓰입니다. 정부가 분양가, 재건축 안전진단 등의 규제를 강화하면서 사업이 지연되자 타의적으로 몸테크하게 된 경우도 종종 있고요.
올 하반기엔 집값보다 전셋값 폭등이 더 화제가 됐습니다.
지난 7월31일 임대차2법(전월세상한제‧계약갱신청구권)이 시행되면서 '전세난'이 심화했기 때문인데요. 임대차 시장에선 기존 세입자를 내보내려는 임대인과 버티려는 임차인의 기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여러 신조어가 나왔죠.
매매계약을 파기한 집주인으로부터 배의 위약금을 돌려받는 '배배테크'(배액배상+재테크)가 있고요. 계약파기를 막기 위해 매수자가 미리 중도금을 건네는 '강제 중도금'과 이에 대항해 매도인이 방어하는 '계좌잠금' 등의 용어도 생겼습니다. ☞관련기사 [집잇슈]'얼마면 돼!'…전세시장에 나온 '위로금'
매물이 귀해지자 전셋값도 가파르게 올랐는데요.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주간 전세가격은 12월 셋째주 기준 78주 연속 상승했습니다.
여기서 '렌트푸어'라는 신조어가 뜨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엔 집값을 감당하는데 소득의 대부분을 지출하는 '하우스푸어'가 있었다면 지금은 전셋값조차 감당하기 벅찬 현실이 반영된거죠.
무주택자들 사이에선 '벼락거지'라는 씁쓸한 용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주택 구매 여부에 따라 자산 격차가 확 벌어졌거든요. 복권에 당첨돼 순식간에 떼돈을 벌게 된 사람이 벼락부자라면, 벼락거지는 소득 수준은 같은데 무주택자라서 유주택자에 비해 자산이 크게 적어진 사람을 뜻합니다. 이제 와서 사기엔 집값이나 전셋값 모두 올라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된 무주택자의 허탈감을 나타낸 용어죠.
부동산 정책을 꼬집는 신조어들도 등장했습니다.
국토교통부가 지난 11월19일 발표한 전세대책에는 호텔을 개조해 임대주택으로 공급하겠다는 안이 포함됐는데요. 그러자 주거 수준이 떨어진다면서 국회나 수요자들 사이에서 반발이 나왔습니다. '엘거'(LH 임대아파트에 사는 거지)를 따라 '호거'(호텔을 개조한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거부감이 컸습니다. ☞관련기사 '아파트>다가구>호텔'…임대주택도 계급 생길라
김현미 전 국토교통부 장관의 발언을 비꼬면서 그를 '빵뚜아네트'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김 전 장관이 "아파트가 빵이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고 한 발언을 과거 프랑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민들이 빵이 없어 굶주리고 있다고 하자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했던 것과 비슷하다며 만들어낸 별칭(?)입니다.
이렇듯 부동산 시장의 혼란이 이어지자 비관적인 용어도 자주 보입니다.
집값 상승, 청약 경쟁 심화 등으로 인해 '이번 생애 집 사기는 망했다'는 뜻의 '이생집망'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고요. 올해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19가 가져온 '코로나블루'(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평가 받는 '부동산블루'도 있습니다. 집값 및 전셋값 상승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주택자의 무력감, 박탈감 등을 표현한 용어죠.
이밖에도 올 한 해 새롭게 등장했거나 자주 쓰인 부동산 신조어, 은어들이 참 많은데요. 전문가들은 집값 상승으로 인해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이같은 현상이 나타났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단기에 서울 아파트를 중심으로 인접 수도권, 지방 주요 지역들의 부동산가격이 급격히 상승하면서 부동산 양극화 현상이 더 심해진 탓"이라며 "유주택자와 무주택자, 고가주택과 중저가 주택 등 격차가 더 벌어지면서 박탈감이 생기고 주택보유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