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국세청의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가 시작된 이후, 세금을 계산해본 근로자들의 상당수는 절망에 빠졌다. 지난해보다 환급액이 줄어들거나 추가 납부액이 발생하는 등 세부담이 무거워진 것이다.
사상 유례없는 근로자의 '조세 저항' 조짐이 엿보이자 정부와 정치권은 서둘러 보완책을 마련했다. 다자녀 가구와 독신자의 공제 폭을 늘리고, 출산 장려와 노후생활 보장을 위한 공제도 보장했다. 이번 연말정산에서부터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소급 적용까지 해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연말정산 대란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다. 근로자들은 당장 2월 월급에서 얼마나 세부담이 늘어났는지 확인하고, 향후 국회의 세법 처리와 소급 적용 여부를 지켜봐야 한다. 소급 적용 자체가 무산되거나, 환급액수가 미미할 수도 있다. 연말정산 대란을 수습하는 길은 '산 넘어 산'이다.
▲ 지난 2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실에서 열린 연말정산 관련 당정협의에서 새누리당 주호영 정책위의장(왼쪽)과 이완구 원내대표(오른쪽)가 최경환 경제부총리(가운데)를 사이에 두고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명근 기자 qwe123@ |
◇ "2월 월급날이 두렵다"
근로자들은 이번 연말정산 환급액이 얼마인지 2월 급여 명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개인별로 지난해 지출한 내역과 규모가 다르지만, 모든 근로자에게 적용된 근로소득공제율 축소와 세액공제 전환이 세부담을 늘리는 것은 분명하다.
기획재정부는 연말정산 제도 변화를 통해 연간 1조원의 소득세를 더 걷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소득세 납부 대상인 1000만명의 과세 근로자는 1인당 10만원씩 더 부담해야 한다.
한국납세자연맹에 따르면 연봉 5500만원을 넘는 근로자 250만명은 거의 한달치 월급을 추가 납부할 것으로 추산됐다. 특히 연봉 7000만원 이상 근로자는 세액공제 전환으로 과세표준이 상승하면서 세부담이 예상보다 더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대학생 자녀의 교육비나 부양가족의 의료비, 기부금 등이 많을수록 이번 연말정산에서 불리하다는 분석이다.
◇ "국회를 믿어야 하나"
연말정산 제도 변화로 인해 확 줄어든 2월 월급을 받은 근로자는 정치권의 소식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2월이나 4월에 열릴 임시국회에서 연말정산 대란의 보완책을 소급 적용하는 법안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만약 여야가 서로 다른 주장을 펴다가 파행을 겪기라도 하면 5월의 세금 환급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벌써부터 법안 처리 과정이 순탄치 않아 보인다. 세법 소관 상임위원회인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정희수 위원장(새누리당)은 소급 적용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밝히고 있다. 법치주의 원칙에 맞지 않고, 형평성 시비로 불거질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야당에서는 복지재원 확보를 위해 기업의 법인세율 인상과 부자감세 철회 등 '증세론'을 펼치고 있어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의료비와 교육비 공제율 확대 등 연말정산 제도의 추가 보완책도 내놓은 터라 협상 과정에서 '제3의 대안'이 등장할 수도 있다.
▲ 지난해 4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트위터 비방' 논란을 일으킨 안홍철 한국투자공사 사장의 거취 문제로 파행을 겪었다. |
◇ "돌려주면 고마울까"
여야가 4월 국회에서 연말정산 소급 법안을 극적으로 통과시키더라도 근로자는 안심할 수 없다. 실제로 추가 환급받을 세액이 크지 않다면 근로자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어렵다.
지난해보다 늘어난 세액은 100만원인 근로자에게 자녀세액공제액을 5~10만원 인상해도 효과는 미미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자녀를 낳지 않았거나, 연금저축에 가입하지 않은 근로자도 소급 적용의 혜택은 받을 수 없다.
오는 5월까지 근로자들이 풀지 못한 불만은 또 다른 불만을 낳게 된다. 당장 8월에 기재부가 발표할 3년차 세법개정안에 대해서도 집단 보이콧 가능성이 있다. 이미 2013년 세법개정안에 이어 이번 연말정산 대란에서 '조세저항 후 리콜'을 경험한 이해당사자들은 증세 정책에 강한 반감을 가질 수 있다.
정부 입장에서도 목소리가 큰 이해당사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만큼, 정책의 신뢰성에도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됐다. 기재부 관계자는 "소급 적용으로 인한 학습 효과가 생기면 조세정책의 안 좋은 선례를 남기게 된다"며 "이제 근로자와 관련한 소득세는 조금이라도 증세하기 어려워졌고, 오랜 기간 추진해 온 면세자 축소 정책도 물 건너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