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하지 않고 어떻게 복지 재원을 충당합니까."-문재인 민주당 후보
"그러니까 제가 대통령 하겠다는 것 아니겠어요."-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201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증세 없는 복지'가 화두에 올랐다. 무상 복지를 실현하는데, 세금을 더 걷지 않고도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당시 박근혜 후보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들은 박근혜 정부에서 증세없는 복지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박 대통령은 "세율 인상이나 세목 신설과 같은 직접적 증세도 없다"고 못박았고, 공약으로 내세운 135조원에 달하는 복지 재원은 지하경제 양성화와 비과세·감면 정비로 충당할 수 있다며 '공약 가계부'도 내놨다.
그런데 경기 불황으로 세수 확보에 난항을 겪으면서 정부의 장밋빛 계획도 틀어졌다. 복지 재원이 필요한데 세수는 제대로 걷히지 않자 '증세'로 눈을 돌렸다. 개별소비세에 담배 항목을 넣어 담뱃세를 인상했고, 근로자의 연말정산 방식을 바꾸면서 소득세 부담을 늘렸다. 세금이 늘었는데 정부는 증세가 아니라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되풀이하니, 납세자들은 더욱 화가 났다.
박근혜 정부의 불통과 꼼수 정책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대통령 지지율은 30%대까지 추락했다. 콘트리트 같다던 대통령 지지율이 날개없이 추락하면서 여당과 정부에 비상등이 커졌다. 민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지만 정부의 대응은 현명하지도, 기민하지도 못했다. 정부와 청와대의 책임있는 인사들이 나섰지만 부실한 사후대응으로 사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와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가 2012년 12월16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열린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 TV 토론회에 앞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 |
◇ 막 둘러댄 경제부총리
"지난해 많이 걷어 많이 돌려주는 시스템이었는데, 덜 걷고 덜 돌려주는 방식으로 개편했다."-최경환 경제부총리
지난 19일 국세청 전국 세무관서장 회의에서 최 부총리는 연말정산 대란의 원인 중 하나로 '간이세액표 개정'을 지목했다. 지난해까지 연말정산으로 환급을 많이 받던 직장인이 갑자기 환급액이 줄어든 것은 매월 원천징수 세액을 줄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실제 직장인의 원천징수 세액을 간이세액표 개정 전후로 비교해보면 최 부총리의 발언은 '오류'에 가깝다. 가장 최근의 간이세액표 개정은 지난해 2월이었는데, 전체 근로자의 평균인 총급여 3000만원 직장인(4인가구)이 매월 원천징수로 떼는 소득세는 1만3150원이다.
2012년 9월 간이세액표가 바뀐 후에도 줄곧 1만3150원으로 매월 원천징수 세액은 변동이 없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2008년 2만6670원에서 2010년 1만5630원으로 조정된 적이 있다. 엄밀히 따져보면 '세금을 많이 내고 많이 돌려받던' 시절은 2009년까지였다.
2010년 이후에는 월급에서 떼는 원천징수 세액이 2500원 정도만 줄어든 셈이다. '덜 걷고 덜 돌려준' 간이세액표 개정 시기는 5년 전이다. 게다가 최 부총리의 발언이 사실이라면 연말정산을 대란은 이미 지난해 발생했어야 한다. 물론 연말정산 환급액이 적어진 5년 전에도 직장인들의 불만은 지금처럼 거세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에서 세금과 관련한 문제의 씨앗은 2013년부터 싹트고 있었다.
▲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지난 19일 세종시 국세청 대강당에서 열린 2015년 전국관서장회의에서 치사를 하고 있다. |
◇ '증세의 벽'도 무너졌다
"세율 인상 등 직접적 증세보다 비과세·감면 정비와 세출 구조조정을 통해 소요 재원을 마련하겠다."-김낙회 전(前) 기획재정부 세제실장(현 관세청장)
세법개정안 발표를 한달 앞둔 2013년 7월 경제5단체 간담회에서 나온 발언이다. 대통령부터 경제부총리, 경제수석까지 "임기 내 증세는 절대 없다"고 강조하던 터였다. 실제로 기재부가 당시 내놓은 세법개정안에 세율을 인상하거나 세목을 신설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근로자의 연말정산 소득공제 방식을 세액공제로 전환하는 방안이 담겼지만, 기재부가 강조하던 '직접적 증세'도 아니었다.
세법개정안을 통해 추가로 걷는 소득세가 5년간 5200억원에 불과하다고 하니, 근로자들은 일단 안심했다. 그런데 국회예산정책처가 다시 따져보니 세액공제 전환으로만 추가로 걷는 소득세가 5년간 5조원이었다. 세액공제 방식이 바뀌면서 한해 1조원의 소득세를 더 걷는다는 의미다.
증세는 않겠다던 정부가 소득세 과세 근로자 1000만명에게 1인당 10만원씩 세금을 더 걷는 세법 개정을 추진한 것이다. 올해부턴 국민건강 증진이라는 명분으로 담뱃세 인상을 시행하면서 정부의 '직접적 증세 불가 방침'도 한순간에 깨졌다. 박근혜 정부가 세운 '증세의 벽'이 무너지는 데 2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2013년 8월13일 당시 현오석 경제부총리(사진 오른쪽)와 김낙회 기획재정부 세제실장이 정부서울청사에서 세법개정안 수정안을 발표하고 있다. |
◇ 재벌 배당 감세로 '뒤통수'
정부가 근로자를 향한 증세 사실을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못했지만, 뒤늦게라도 국민의 이해를 구하고 함께 허리띠를 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부자를 향한 감세 조치가 나오면서 국민들이 생각하는 형평성의 마지노선도 무너졌다.
지난해 정부가 발표하고 국회가 통과시킨 배당소득 증대세제는 내수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상장주식의 배당 세금을 깎아주는 내용이다. 그런데 수혜 대상이 상장주식의 주주인 만큼, 재벌가의 배당 세금부담만 줄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1인당 10만원씩 세금을 더 내야할 근로자들은 대기업 주주들의 세금이 줄어드는 것이 못마땅할 수 밖에 없다.
부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수직적 조세형평성'은 허물어졌다. 게다가 대기업들의 곳간에는 돈이 쌓여있다는 지적이 많지만 법인세 인상은 입도 뻥긋말라는 분위기다. 안팎으로 불만이 쌓이면서 근로자들의 반발과 저항 수위도 극으로 치달았다.
정작 배당소득 증대세제를 반겨야 할 자본시장 마저도 반응은 차갑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배당소득 증대세제는 주식 시장 활성화 효과는 미미한 대신, 재벌 감세로 근로자들에게 상대적인 박탈감만 안겨줬다"며 "임금이 오르지 않는데 세금 부담만 늘어나니 근로자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