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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한끗]②미원, '조미료 독립'을 선언하다

  • 2021.07.15(목) 15:00

해방 후 '아지노모토' 수입금지…조미료 대란
36세 사업가 임대홍, 일본서 제조법 배워 귀국
국산 첫 조미료 '미원'생산…'아지노모토' 대체

/ 그래픽=비즈니스워치

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집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가격은 상관없으니 아지노모토 좀…"

아지노모토는 조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하얀 가루를 조금만 넣어도 엄청난 맛이 나다 보니 식당이고 가정이고 너도나도 아지노모토의 포로가 됐죠. 심지어 아지노모토의 가격은 무척 비쌌습니다. 조선에 처음 발매됐을 때 아지노모토 작은 병 하나의 가격은 40전이었습니다. 당시 쌀 1㎏이 16전이었으니 아지노모토가 얼마나 고가(高價)의 제품이었는지 아시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노모토는 늘 품귀현상을 빚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냉면집은 물론 설렁탕집, 중국집 등 모든 식당이 아지노모토를 썼습니다. 당시 고깃국물을 내던 냉면집이나 설렁탕집들은 대부분 여름철 식중독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냉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고깃국물이 무더위에 상하기 쉬웠죠. 아지노모토는 이를 해결해 줬습니다. 그러다 보니 늘 물량이 달렸고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1930년대 국내 일간지에 실린 '아지노모토' 광고. 당시 우리나라 식생활에 아지노모토가 깊숙히 침투해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사진 출처=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등

하지만 이렇게 큰 인기를 끌던 아지노모토도 역사의 큰 물결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면서 아지노모토는 수입 금지 품목이 됩니다. 안 그래도 물량이 모자란데 수입 금지까지 되니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난리가 납니다. 거의 모든 식당이 아지노모토에 의존하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아지노모토는 정상적인 경로가 아닌 밀수 등을 통해 불법적으로 한국에 유통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아지노모토의 인기는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미 아지노모토에 중독된 한국 사람들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가뜩이나 고가의 제품인데 이젠 밀수 등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었으니 그 가격이 오죽 뛰었을까요. 한동안 아지노모토는 부잣집에서나 몰래 쓸 수 있는 값비싼 조미료로 여겨졌습니다. 서민들은 더 이상 아지노모토의 맛을 보기가 힘들어진 거죠.

호랑이 잡으러 호랑이 굴로

한국에 아지노모토 대란(大亂)이 계속되자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이가 있었습니다. 대상그룹 창업주 고(故) 임대홍 창업회장입니다. 임 회장은 학교를 마치고 공무원 생활을 하다 피혁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후 부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죠. 일본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부산에는 밀수로 들어온 아지노모토가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아지노모토의 인기를 직접 보고 체감한 거죠.

여러 자료에서는 임 회장이 한국의 식탁을 점령한 아지노모토에 분개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아지노모토 제조법을 배워왔다고 돼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사업가였던 임 회장의 눈에 아지모노토의 폭발적인 인기는 분명 기회로 보였을 겁니다. 아지노모토를 우리가 직접 생산한다면 큰돈을 만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일면 '합리적 의심'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1956년 일본에서 돌아온 고(故) 임대홍 대상 창업회장은 부산에 동아화성공업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미원' 생산에 나선다. 사진 오른쪽이 동아화성공업 시절의 임대홍 회장. /사진제공=대상그룹

어쨌든 36세의 젊은 사업가 임대홍은 아지모노토의 맛을 구현하기 위해 갖가지 재료를 사용해 실험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맛'이 나질 않았습니다. 실패만 거듭했죠. 하긴 그렇게 쉽게 성공할 것이었으면 누군가가 이미 오래전에 제품을 내놨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아지노모토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일본으로 간 임 회장은 아지노모토에 종업원으로 취직합니다. 그곳에서 1년간 일하며 어깨너머로 아지노모토의 제조 비법 파악에 나섭니다. 하지만 일개 종업원이 제조 비법을 알아낼 수가 있었을까요. 게다가 아지노모토 제조법은 1급 비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밤낮으로 연구했습니다. 아지노모토를 퇴직한 직원들을 찾아다니기도 했죠. 그렇게 알아낸 것들을 들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그때가 1956년입니다.

'미원'의 탄생

임 회장은 귀국 후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어깨너머로 배워온 글루탐산 제조법이 확실치 않아서였습니다. 그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합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개발법을 찾아내죠. 그것이 바로 '미원'입니다. 임 회장은 1956년 부산에 동아화성공업(현 대상)을 설립합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미원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값비싼 아지노모토가 아닌 국산 미원의 인기는 대단했습니다. 공장에 도매상들이 줄을 섰죠.

하지만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150평 남짓한 공장에서 하루에 생산할 수 있는 양은 많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또 있었습니다. 글루탐산은 분해 시 그릇이 부식됩니다. 임 회장을 이를 막기 위해 옹기를 구워 미원 제조에 나섭니다. 그러나 옹기솥도 고온과 부식을 견뎌내지 못했습니다. 옹기는 구워서 만들다 보니 크기도 작았죠. 결국 그는 다른 용기를 만들 궁리를 합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돌솥, '석부(石釜)'입니다.

'미원' 생산에 성공한 임대홍 회장은 생산과정에서 용기가 자주 부식되는 현상을 방지하고 대량 생산을 위해 돌솥인 '석부'를 제조, 대량 생산에 성공한다. 사진은 대상 군산공장에 전시돼있는 석부의 모습. / 사진출처=대상 홈페이지 캡처

임 회장은 석공들과 함께 전국을 돌며 솥을 만들 돌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다 찾은 것이 전라북도 황등산에서 찾은 화강암입니다. 임 회장은 이 화강암으로 석부를 만들어 미원 대량생산에 나섭니다. 석부가 도입되면서 미원의 월 생산량은 기존 1~2톤에서 월 10톤까지 늘어납니다. 이 석부는 훗날 발효공법으로 미원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쓸모가 없어져 명예롭게 퇴역하죠. 지금은 대상 군산공장 사무동 앞 정원에 전시돼있습니다. 

미원의 탄생은 당시 우리나라 식생활에 일대 혁명이었습니다. 아지모토를 완벽하게 대체하면서 큰 인기를 끕니다. 이미 아지노모토의 맛에 길들여져있던 우리 국민들은 이제 미원에 열광하게 됩니다. 미원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미원 생산 6년 만인 1962년 아예 사명을 '미원'으로 바꿉니다. 미원의 탄생은 본격적인 국산 조미료의 시작임과 동시에 아지노모토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했습니다.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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