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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화장품법 개정안에 '소비자'는 없었다

  • 2021.08.16(월) 14:00

'화장품 제조원' 표기 삭제 개정안 상정
화장품 업체 '찬성'…제조업체는 '반대'
'품질 저하' 우려…피해는 소비자 몫

/그래픽=비즈니스워치

화장품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 상정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9월 김원이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번 개정안은 '화장품 제조업자'의 의무 표기 조항을 없애자는 것이 골자다. 현행법에 따르면 국내 유통 화장품의 경우 화장품 판매 브랜드 외에도 제조원을 명시해야 한다.

화장품 제조원 표기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왔다. 화장품 업체와 제조 업체는 지난 2014년부터 7년 가까이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화장품 업체는 영업 비밀 등의 이유로 해당 법안에 찬성한다. 비슷한 종류의 화장품을 판매하는 경쟁 업체가 제조 업체에 직접 연락해 제품을 베낀 사례가 많다는 이유에서다. 반면 제조 업체는 소비자의 알 권리 등을 내세워 해당 법안을 반대해왔다.

논란의 배경에는 화장품 제조·유통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 국내에서 판매 중인 화장품은 대부분 주문자위탁생산(OEM)이나 제조자개발생산(ODM)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화장품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화학 제품 제조 생산 라인을 구축해야 하는 등 비용이 많이 든다. 따라서 자체 생산 라인을 갖춘 일부 대기업 화장품 업체를 제외하곤 대부분 외부 업체에 화장품 제조를 맡기고 있다.

논란은 화장품 업체가 제조원 정보 공개 탓에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면서 불거졌다. 해외 화장품 업체가 국내 인기 화장품 브랜드의 제조 업체에 연락해 비슷한 제품을 출시하는 사례가 발생했다. 화장품은 원료와 배합 비율 등의 정보만 있으면 비슷한 제품을 쉽게 모방할 수 있다. 이에 따라 화장품 업체들은 제조업체가 곧 '영업비밀'인 만큼 제조원을 표기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여기에 화장품 업체들은 '책임 소재'까지 앞세워 법안 상정을 추진 중이다. 화장품법에 따르면 화장품의 품질과 안전을 책임지는 주체는 화장품을 판매하는 화장품 책임 판매업자, 즉 브랜드사다. 화장품 업체가 품질관리 기준부터 부작용 발생 등 모든 판매·유통 과정의 책임을 지고 있는 만큼 굳이 제조원을 표기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화장품 제조 업체들의 생각은 다르다. 국내 대표 화장품 제조 업체로는 한국콜마와 코스맥스, 코스메카코리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의 국내 OEM 시장 점유율은 70%에 달한다. 국내에서 화장품 OEM·ODM을 맡고 있는 제조 업체는 약 4000곳이다. 이중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조품질관리기준(GMP) 인증을 받은 업체는 204곳에 불과하다. 같은 브랜드의 제품임에도 제조원이 달라 품질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많은 소비자들이 화장품 구매 시 화장품 용기에 적힌 제조원을 확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장품 업체들의 주장과 달리 품질 이슈 발생 시 제조 업체들도 책임소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화장품의 경우 기업의 규모와 상관없이 제조업체에게 OEM·ODM을 요청하면 어떤 업체든 판매 업체가 될 수 있다. 개인 판매업자도 OEM·ODM 방식으로 화장품 판매가 가능하다.

따라서 실제 품질관리나 부작용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판매 업체가 책임을 지지 못할 수 있다. 제조 업체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2011년 발생한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에서 제조 업체인 옥시레킷벤키저의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았다.

문제는 이런 법안 추진 과정에 정작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최종적으로 제품을 구매하는 주체는 소비자다. 하지만 제조원 표기가 사라지면 소비자는 제품의 안정성이나 선택권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된다.

화장품 제조원 표기는 '안전'과 직결돼있다. 제조원 표기가 없으면 품질 관리가 어렵다. 제조사가 해외인지 국내인지조차 알 수 없다. 불량 화장품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현재 화장품 업체는 소비자를 의식해 인지도가 있는 제조 업체에 OEM·ODM을 맡기고 있다. 제조원 표기가 사라지면 화장품 업체들에게는 유리하다. 가격 경쟁력 확보를 명목으로 품질 관리 기준을 갖추지 않은 제조 업체에 제조를 의뢰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알 권리'다. 소비자는 브랜드를 믿고 화장품을 구매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화장품의 제조 업체를 보고 구매를 결정할 수 있다. 생소한 브랜드라도 제조 업체를 신뢰할 수 있다면 제품을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 제조원 표기가 사라지면 소비자의 선택의 폭은 줄어든다.

이번 화장품법 개정안의 제안 이유에는 "해외 업자가 유사품 제조를 의뢰해 국내 수출 기업에 타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며 "외국과의 규제 조화를 위해서 화장품 제조 업체의 정보까지 의무로 표시할 필요는 없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화장품 제조원 표기를 삭제하는 것은 '제품 베끼기'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비슷한 제품이 난립하는 문제는 독점 판매 계약이나 특허권 등의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번 개정안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은 빠진 채 화장품 업체의 편만 들어주는 제도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게다가 법안 발의 목적엔 소비자가 빠져 있다. 일부 기업의 이득을 위해 정작 중요한 소비자는 외면한 법안은 아닌지 따져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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