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유통]은 한주간 유통·식음료 업계에서 있었던 주요 이슈들을 쉽고 재미있게 정리해 드리는 콘텐츠입니다. 뉴스 뒤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사건들과 미처 기사로 풀어내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편집자]
홈플러스가 기습적으로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한지 40일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여러 이해관계자와의 갈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협력사의 납품 중단 문제는 대부분 해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LG전자, 농심, 롯데칠성음료 등 기업회생 절차 신청 직후 납품을 멈췄던 대기업 협력사 대부분이 다시 홈플러스와 거래를 재개했습니다. 홈플러스는 소상공인과 영세업자의 채권을 먼저 상환할 수 있도록 대기업 협력사들에게 "양보해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해왔습니다.
하지만 그랬던 홈플러스가 최근 돌연 태도를 바꿨습니다. 지난 7일 보도자료를 통해 소수의 대기업 협력사 때문에 영세한 2차 협력사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특히 그 '소수의 대기업 협력사'로 서울우유협동조합, 농협경제지주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기까지 했습니다.
대기업의 횡포?
이날 홈플러스가 내놓은 보도자료는 한국농축산연합회의 성명서를 언급하면서 시작합니다. 한국농축산연합회는 22개 농축산단체들이 모여 만든 이익단체입니다. 지난달 13일 성명서를 통해 "홈플러스의 대금 정산이 계속 지연되면서 신선식품인 농·축산물을 유통해야 하는 일선 농협, 영농조합, 유가공조합 등 농·축산 업계는 큰 충격에 빠져 있다"며 정부에 조속한 대책 마련을 요구한 바 있습니다.
홈플러스는 그간 한국농축산연합회의 성명서에 대해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의 한 달 여가 지나서인 지난 7일 "한국농축산연합회가 '홈플러스의 대금 정산이 지연되면서 농축산물을 유통하는 농축산업계 피해가 커지고 있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을 포함한 보도자료를 내놨습니다. 농축산업계의 피해는 홈플러스가 아닌 다른 곳에 원인이 있다는 주장을 편 겁니다.
대형마트에 대한 납품 거래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농축산 농가가 유통 채널과 직거래하는 경우가 있고요. 또 서울우유, 농협과 같은 협동조합이 농가로부터 농축산물을 수매해 유통채널에 납품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대형마트 입장에서는 서울우유, 농협이 1차 협력사이고 농가가 2차 협력사가 됩니다.

홈플러스의 보도자료에서 문제의 1차 협력사로 저격된 건 서울우유와 농협경제지주였습니다. 홈플러스는 서울우유가 회생채권 전액 즉각 변제, 대금의 현금 선납 등을 요구하면서 납품을 중단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소상공인들에 대한 물품 대금 지급이 완료되는 오는 6월부터 분할 변제하겠다는 계획을 전달했는데도, 서울우유가 대금 현금 선납 요구를 고수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울러 홈플러스는 농협경제지주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대금 정산을 받고도 단순히 '불안하다'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으로 채권한도를 대폭 축소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때문에 서울우유에 원유를 납품하는 축산 농가, 농협경제지주를 통해 납품하는 지역농협과 쌀 농가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게 홈플러스의 주장입니다.
이어 홈플러스는 "공익단체인 한국농축산연합회가 현재 상황에 대한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해 이런 문제의 원인인 농협경제지주나 서울우유 등 일부 대기업 및 주요 단체를 설득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얼핏보면 마치 한국농축산연합회가 무엇이 원인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다며 일침을 가한 것처럼 보입니다.
홈플러스의 적반하장
한국농축산연합회는 반발했습니다. 한국농축산연합회는 홈플러스의 보도자료가 나온 당일 "홈플러스의 적반하장, 소도 웃을 일"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놨습니다. 이 성명서에는 "정부와 국회에는 읍소하고 농·축산업계에는 으름장을 놓는 홈플러스의 깊은 자성이 요구된다"는 말까지 포함돼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홈플러스의 주장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한국농축산연합회는 "확인 결과 홈플러스의 주장과 달리 농협경제지주는 홈플러스에 납품을 이어오고 있다"며 "서울우우유협동조합은 납품 재개를 위해 신용등급이 하향조정된 홈플러스에 결제주기 조정 등을 지속적으로 협의해오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울우유의 입장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울우유는 2차 협력사인 농가가 피해를 입고 있다는 홈플러스 주장에 대해 "서울우유 낙농조합원들은 현재도 원유를 정상적으로 납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회생채권 전액을 현금으로 내놓으라는 요구를 한 적도 없다는 입장입니다.
서울우유는 "회생절차개시 이후에 발생되는 '공익채권'에 한해 어음이 아닌 현금 지급을 요청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 "일방적으로 납품을 중단한 사실도 없다"며 "향후 원만한 합의가 이뤄질 경우 공급 재개를 위한 협의에 나설 계획"이라고 전했습니다.
농협경제지주는 더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아예 홈플러스 측에 보도자료 정정까지 요구했는데요. 이 때문에 홈플러스는 해당 보도자료 배포 이틀만인 지난 9일 "7일 당사가 배포한 자료에 수정할 부분이 있어 바로잡는다"는 내용의 정정 자료를 새롭게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농협경제지주는 기업회생절차가 계약해지 사유임에도 농협경제지주는 내부 방침을 별도로 수립해 홈플러스와 계속 거래를 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또 "농협과 홈플러스 간 상호 협의 하에 쌀을 공급하고 있으며 쌀은 농협경제지주 외에도 지역농협이나 민간 미곡종합처리장(RPC) 등을 통해서도 구매할 수 있어 농협경제지주의 쌀 농가의 피해로 직결되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비는 누가 내리게 했나
업계에서는 홈플러스가 대기업들의 납품 재개를 요구하기 위해 2차 협력사를 핑계 삼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사실 2차 협력사 피해의 근본적인 원인은 납품 중단 사태를 불러온 홈플러스에게 있는데도 말이죠.
홈플러스는 지난달 신용등급 하락에 따른 유동성 위기를 이유로 갑작스럽게 회생 절차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대기업이라도 홈플러스의 신용도가 떨어진 상황에서 납품을 이어가기는 어렵습니다. 무작정 상품을 납품했다가 추후 대금을 받지 못할 수 있어서 입니다. 협력업체 입장에서는 납품 결정 전에 채권 회수 여부를 고려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홈플러스는 모든 문제가 대기업의 횡포인 것처럼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홈플러스의 보도자료에는 "생계가 달린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2만명의 직원들이 힘을 모아 정상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부 대기업과 주요 이해단체들이 정상화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자신의 몫만 우선 챙기려다 보니 '비 오는 날 우산 뺏기' 식의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고 적었습니다. 정작 비가 오게 만든 게 홈플러스, 그리고 대주주인 MBK파트너스라는 사실은 쏙 빼놨죠.
홈플러스가 만든 '비' 때문에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타격을 입고 있습니다. 2만여 명의 홈플러스 직원, 1800여 개의 협력업체, 7000여 곳의 테넌트뿐만 아니라 증권사, 국민연금, 유동화 전단채(ABSTB) 투자자까지 피해를 입었죠. 이들이 우산을 들 시간도 없이 기습적으로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한 건 바로 홈플러스와 MBK입니다. 홈플러스와 MBK파트너스가 엉뚱한 곳을 향해 손가락질 하기보다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