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의 핵심업무인 보험금 산정을 담당하는 '손해사정제도'가 8년이란 시간을 거쳐 대대적인 개선작업이 이뤄진다.
앞서 금융당국이 2013년 손해사정제도 개선방안을 논의해 세부과제를 만들고 2013년 하반기와 2014년 상반기 세부과제 시행 일정까지 짜뒀지만 시행을 앞두고 흐지부지됐었다. 일반원칙 없이 자율성에 기반해 제도개선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사이 소비자 보호 강화가 추진되며 소비자가 직접 손해사정사를 선임하는 '독립손사' 선임권 강화와 손해사정사의 업무범위 확대 논의 등 일부 움직임은 있었다. 하지만 손해사정 업무의 일반원칙, 기준 등을 법률에 명시해 제재 근거를 마련하고 제도의 실효성을 높인 제도개선 작업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번이 처음이다. ▷관련기사: [보험정책+]손해사정 최초 '표준 업무기준' 만든다(5월25일)
추진을 앞둔 손해사정제도 개선과 관련해 몇 가지 과제를 짚어봤다.
독립손해사정사 활성화 언제쯤?
금융당국은 보험금을 산정하는 손해사정사를 소비자가 직접 선임할 수 있도록 한 '직접선임권'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부터 분쟁소지가 적은 '단독실손보험'에 한해 소비자가 손해사정사 선임을 원할 경우 보험사가 원칙적으로 선임에 동의하도록 하고 선임 비용도 보험사가 내게 했다.
손해사정 업무를 담당하는 손해사정사는 보험사에 소속된 고용손사, 보험사의 자회사인 손해사정회사나 비자회사에 소속돼 위탁을 받는 위탁손사, 보험사와 별개로 독립법인으로 있는 독립손사가 존재한다.
보험사들은 대부분의 손해사정 업무를 자회사에 맡겨 '셀프 손해사정' 논란을 빚어왔다. 자회사에 일감을 몰아주다 보니 손해사정사들이 보험사에 종속돼 불공정 계약 문제가 불거지고 소비자들은 보험금 지급에 대한 불만과 보험산업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는 상황이었다.
보험업법, 보험업감독규정 상으로는 이미 보험계약자가 손해사정 전후에 별도로 손해사정사를 선임할 수 있고, 보험사 동의를 얻으면 보험사가 비용을 내도록 하는 규정도 있었다. 하지만 보험사 동의를 받기 어려워 사실상 제도가 유명무실하자 당국이 제도 활성화에 나선 것이다.
보험금 산정을 요청하는 주체가 보험사가 아닌 소비자이고 소속이 보험사와 상관 없을 경우 소비자가 보험금 산정에 대해 보다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보험민원이 전체 금융권 민원의 절반 이상, 그중에서도 보험금 산정과 지급 관련 민원이 생보 17.5%, 손보 44.2%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보험산업 전체의 신뢰회복을 위해서도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당국이 소비자가 직접 선임하는 독립손사에 대한 동의를 보험사에 사실상 강제하였음에도 지난해 실손보험 손해사정사 선임권을 활용한 사례는 약 90건에 불과하다. 매년 실손보험금 신청건수가 수천만건에서 1억건 이상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미미한 숫자다.
이에 당국은 △소비자에게 독립손사를 선임할 수 있다는 내용과 △비용을 보험사가 부담한다는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규정하고, 동의하지 않을 경우 이유를 소비자에게 상세히 안내하는 것에서 보험사기 연루자나 불공정행위 등으로 제재를 받은 손해사정사가 아닌 경우를 제외하고 동의하도록 요건을 확대했다.
소비자가 손해사정업자를 선택해 선임할 수 있도록 자율공시 중인 손해사정업자 공시도 확대, 의무화한다. 손해사정업체에 대한 일반현황을 비롯해 위탁 체결현황, 경영 실적 등을 공시하고, 향후 △전문분야 △사고유형 △매출액 등에 따라 검색할 수 있는 체계도 마련한다는 방침이다. 공시의무 미이행 시 과태료 부과 등 제재 근거도 마련했다.
하지만 이같은 내용들은 아직까지 단독실손보험에 한해서만 적용된다. 단독실손보험은 특약이나 정액 부분을 제외해 분쟁소지가 적고 실제 제도적 영향도를 파악하기도 미미한 수준이다. 독립손사를 활성화하기 위해서 영역확대가 필수적인 이유다. 하지만 보험업계에서 비용 증가와 분쟁 소지가 늘어날 것을 우려해 반대하고 있어 이를 다른 영역까지 확대하기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단독실손은 보험사 동의하에 시범 적용한 것으로 이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법령개정이 필요하다"라며 "관련 내용은 아직 논의 중에 있다"라고 말했다.
손사업계 관계자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지만 보험사의 반대가 심한것도 사실"이라며 "개선 진행방향과 당국 의지에 따라 방향이 가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무자격 손해사정 근절될까?
손해사정업무에서 위탁손사와 함께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바로 손해사정 보조인을 통한 '무자격 손해사정'이다. 보조인은 손해사정사와 달리 보험금 산정 자격이 없다. 하지만 손해사정사가 아닌 보조인을 보내 보험금을 산정하는 무자격 손해사정 민원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업무량에 비해 손해사정사가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보험사 전체 위탁의 75%, 일부는 100%를 자회사에 위탁하는데, 이들 자회사의 손해사정사 대비 보조인의 수는 5배 가량 더 많다. 국회입법조사처 자료에 따르면 2017년말 기준 전체 손해사정사 가운데 자회사에 소속된 손해사정사수는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손해사정업계 관계자는 "위탁손사 규모가 독립손사에 비해 크고 그에 따른 매출 규모도 훨씬 크지만 오히려 보수 자체는 위탁손사가 낮다"라며 "이는 위탁손사의 보조인 수가 손해사정사 대비 훨씬 많기 때문인데 전문적인 손해사정 인력을 쓰면 보수가 높아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싼 보조인을 통해 손해사정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이러한 보조인이 어디까지 업무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범위가 법에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라며 "구체적인 범위가 정해지면 무자격 손해사정을 근절하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역시 쉽지는 않다. 현재 국내 손해사정사 가운데 독립손사, 위탁손사에 대한 규모파악도 제대로 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국은 2019년 말 기준 등록 손해사정사를 1만1400명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이중 법인이 1300개라는 것만 파악하고 있을 뿐 독립손사, 위탁손사 규모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등록돼 있지 않은 보조인의 수는 말할 것도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보조인에 대한 업무범위가 어디까지 정해질지, 이에 따라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무자격 손해사정을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여전히 과제다.
금융위 관계자는 "무자격 손해사정에 대한 제재를 강화하고, 손해사정 관련 전반적인 업무범위를 정하면 자동적으로 보조인 업무범위와 의무도 정해질 것도 정해질 것"이라며 "종합적으로 내용을 정비하는 한편 표준기준이 나오면 업계와 협의를 거쳐 업무 범위 등을 정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손해사정업계 관계자는 "업계에서도 추정만 할 뿐 전체적인 규모 파악이 안됐을 정도로 손해사정제도는 아직까지 걸음마 단계에 있다"라며 "다만 공시 의무화를 통해 공시 내용이 확대되면 이같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라고 말했다.
학계 관계자는 "아직까지 넘어야 할 산들이 많이 있지만 수년만에 손해사정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제도개선이 이뤄진다는 점에서는 고무적"이라며 "기본적인 틀이 드디어 마련되는 만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문제점에 대한 개선작업들을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