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시중은행의 기업대출이 전월 대비 역성장했다. 연말을 제외하고 이번처럼 기업대출이 줄어든 건 2020년 6월 이후 처음이다.
가뜩이나 경기가 악화한 상황에서 국내 정치 불확실성까지 커지면서 기업이 투자를 주저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2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 기업대출(대기업·중소기업·개인사업자 합산) 잔액은 올해 3월말 825조2093억원으로 전월(827조7030억원)보다 2조4937억원 감소했다. 올해 2월말엔 전월(825조7728억원)보다 1조9302억원 증가했었다.
개별 은행에 따라선 연말 이외에도 간혹 월별로 줄어든 곳이 있지만 5개 시중은행을 합산해 봤을 때에는 12월을 제외한 모든 달이 전월 대비 증가했던 것과 대조된다.

기업대출이 연초부터 급감한 건 이례적이다. 기업은 보통 상반기 중 신년 계획 이행에 돌입하기 때문에 연초면 은행 문을 두드린다. 은행도 연말에 대출을 줄였다가 새해 1월부터 기업 고객 유치전에 돌입한다. 하지만 올해는 상담이나 문의 자체가 거의 없다는게 은행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복수의 시중은행 관계자는 "중소기업 대출 상담이 눈에 띄게 줄었다"고 입을 모았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기업 규모를 막론하고 대출을 받지 않거나 받았던 대출을 갚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은 은행권 기업대출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두 번째로 비중이 큰 개인사업자 대출은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모두 전월 대비 감소했다. 감소 규모만 보면 지난 3월 대기업 대출이 가장 크게 줄었다.
연초 은행권 기업대출이 급감한 이유로는 기업의 투자위축이 꼽힌다. 설비를 확충하거나 공장을 증설하는 등 기업이 몸집을 키울 만한 신년 계획이 나와야 은행권 기업대출이 늘어나는데, 올해 기업들은 몸 사리기를 택했다.
투자위축은 지난해 12월 계엄 선포로 촉발됐다. 가뜩이나 경기악화 상황에서 국내 정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환율이 폭등하는 등 경영 환경이 악화했다. 기업들은 신년 투자 계획을 이행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보고 있다.
이후 대통령 탄핵 선고가 지연된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올해 1월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 리스크도 기업 투자를 주저하게 했다.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올해 1월 국내 기업 설비투자는 전월 대비 14.2% 감소했다.
대기업들이 은행권 대출 대신 회사채 발행을 선택하고, 앞서 대출을 받았던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들은 이자 부담에 대출금 상환을 택하고 있다는 점도 이번 기업대출 잔액 감소 요인으로 꼽혔다.
은행들이 보통주자본비율(CET1) 관리를 이유로 기업대출을 선별적으로 해 잔액이 줄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CET1은 은행 건전성과 배당 여력을 나타내는 지표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경기 악화로 연체율이 치솟을 기미가 보이자 기업대출을 신용등급이 좋은 우량차주 위주로 하려는 경향이 짙어졌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