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산업계가 저유가에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대규모 장치산업 및 수주산업은 저유가 직격탄을 맞은 반면 항공 등은 원가를 크게 절감하며 많은 이익을 거두고 있다. 저유가가 국내 주요 산업에 어떤 영향을 주고, 각 업계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알아본다. [편집자]
글로벌 항공업계에 저유가는 하늘이 준 선물이다. 일반적으로 유류비는 항공사 영업비용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기 때문에 기름값이 낮아질수록 항공사 이익은 커진다.
하지만 저비용항공사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항공시장 경쟁은 점점 격해지고 있다. 저유가는 항공업계 전체에 호재가 되고 있지만, 이는 경쟁에 뛰어든 모두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저유가로 이익을 내고 있지만 잔치에 돈을 쓸 겨를은 없다는 얘기다. 지금은 유가 하락에 따른 호황을 만끽하고 있는 항공업계도 그 뒤를 준비해야 글로벌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 항공시장 전망 저유가 덕에 '맑음'
올해 국내 항공사들은 상반기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악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싼 기름값 덕에 실적을 개선하고 있다. 대한항공은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이 4767억원을 기록했고, 아시아나항공과 저비용항공사(LCC)인 제주항공은 각각 849억원, 474억원의 영업익을 거두고 있다.
내년에도 실적 호조는 이어질 전망이다. 글로벌 항공업계는 내년 사상 최대 수준의 순이익이 나올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 전 세계 항공사들의 단체인 국제민간항공운송협회(IATA)는 내년 항공업계의 순이익이 363억달러로, 올해(연말 수정전망치 기준)보다 10% 증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IATA 내년 시장 전망(위, 유가 = 브렌트유 기준), 연도별 항공업계 세후순이익 규모와 EBIT마진 추이(아래) |
올해 개선된 실적과 내년 밝은 전망의 배경에는 저유가가 있다. 내년에는 유가 하락으로 연료비 부담이 줄어드는 데다 중국의 경기 둔화와 테러 등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항공 수요는 안정적으로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올해보다도 나은 영업기반을 다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토니 타일러 IATA 사무총장은 "항공업계가 마침내 수 년 간의 자본잠식을 뒤로하고 투자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수익성을 갖추게 됐다"며 "항공산업은 탄탄한 금융·영업성과를 보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IATA는 내년 항공사들이 구매하는 평균 연료 가격을 배럴당 63.8달러로 예측했다. 이는 작년 상반기의 절반 수준이다. 내년 항공사들의 영업 비용에서 연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올해보다 6%포인트 낮아진 21%로 예상됐다.
◇ 항공사 이익, 유가 따라 '오르락내리락'
항공업계는 워낙 영업비용에서 유류비 비중이 크다보니 유가에 따라 실적 변동성이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대한항공의 경우 유가가 연초 예상에서 배럴당 1달러만 변동해도 3200만달러(375억원)의 손익이 엇갈리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때문에 유가의 급변에 따른 실적의 부침을 최소화하기 위해 헤지(Hedge, 위험회피) 계약을 한다. 시가(時價)에 현물로만 항공유를 구입하는 것뿐 아니라 선물이나 옵션상품 등을 거래해, 기름값을 일정한 범위 안에 묶어두는 것이다.
▲ 올해 영국 브렌트유 추이와 전문가들 전망(출처:FT) |
유가 급변기에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헤지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아시아 항공유 가격 지표인 싱가포르 등유 가격이 배럴당 100달러에서 60달러대까지 떨어졌다고 해도 낮아진 40달러만큼이 그대로 이익이 되는 건 아니다. 헤지 비용이 있는 만큼 저유가에 따른 항공사들의 이익은 배럴당 80달러 정도일 때 수준으로 제한된다.
하지만 유가라는 변수는 내년 이후에 어떤 흐름을 보일지 불확실하다. 최근 미국의 금리 인상에 따른 달러 강세도 항공 수요에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항공업계가 저유가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이후라는 얘기다.
◇ 저유가 잭팟에도 잔치 못 벌이는 이유
항공사들이 고연비 신기종을 도입하는 데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천수답(天水畓)' 농부처럼 저유가의 지속을 바라기만 할 게 아니라 유가가 다시 올라도 버틸 수 있도록 경쟁력 있는 기단을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한항공은 지난 달 미국 보잉사, 프랑스 에어버스사로부터 각각 50대씩 총 100대의 차세대 항공기를 도입키로 하는 계약을 맺었다. 무려 13조원에 달하는 투자규모다.
이를 통해 도입하는 B737맥스-8, A321네오는 각각 대표적 차세대 기종으로 동체 소재와 설계, 엔진성능 등을 대폭 개선해 기존 동급 항공기보다 연료를 15~20% 절감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 그래픽 = 김용민 기자 |
아시아나항공의 경우 내후년부터 2025년까지 중대형 기종인 A350XWB 30대를, 2019년부터 2025년까지 중소형 기종인 A321-200 네오 25대를 들여오기로 했다. 역시 연료효율이 높은 차세대 기종이다. 기존 구형 항공기 중 A321-200 5대는 에어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드는 저비용항공사(LCC) '에어서울'로 보내 기단 효율을 극대화한다는 방침이다.
국내 LCC 선두주자인 제주항공은 올해만 항공기 5대를 늘려 총 22대를 보유하게 됐다. 이는 국적 LCC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다. 제주항공은 내년에도 같은 기종의 항공기 6대를 추가 도입(2대 반납)해 기단 규모를 26대까지 키울 계획이다. 최근 기업공개(IPO)를 통해 상장한 것도 기단 규모를 확대할 실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 같은 대규모 투자 뒤에는 국내·외 저가항공사들의 성장에 따른 위기감도 자리잡고 있다. IATA는 내년 글로벌 항공업계의 순이익률을 5.1%로 예상했지만, 경쟁이 심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순이익률은 이보다 훨씬 못미치는 3.2%로 제시했다. 동남아 국가에서 난립한 LCC 때문이다. 격한 경쟁 탓에 타이항공, 말레이시아항공 등은 구조조정에까지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한 대형 항공사 관계자는 "항공업계가 저유가의 대표적인 수혜업종으로 꼽히지만 선제적인 투자와 기단 효율화 없이는 고유가 시기가 왔을 때 경쟁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며 "그러나 무턱대고 투자를 늘리면 차입금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재무 건전성을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