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레고랜드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은 금리인상 기조에 가뜩이나 어려운 채권시장을 급격하게 냉각시켰다. 국가신용등급에 준하는 지방자치단체가 보증한 채권이 부도에 이르면서 '채권=안전자산'이란 시장의 암묵적인 공식도 깨졌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전력공사가 대규모 적자를 이유로 발행하는 채권(한전채)이 시중의 회사채 수요를 대거 빨아들이고 있는 점은 등한시할 수 없는 화약고다.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한전채가 쏟아지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신용등급이 낮은 일반 회사채는 외면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당장 연말까지 돌아오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자산유동화증권(ABCP) 만기 또한 시장의 공포를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다.
반토막 난 회사채 발행…본격화되는 '돈맥경화'
정부가 시장에 '50조원 플러스알파(+α)' 규모의 유동성 공급을 시작했지만 25일 신용등급 'AA-'인 회사채 3년물 금리는 연 5.528%에 거래를 마쳐 국고채 3년물(연 4.221%)과 신용 스프레드가 1.307%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이는 연중 최고치는 물론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5월19일(1.309%포인트) 이후 최고 수준이다.
이런 극악의 금리 상황 속에서 회사채 발행시장은 더욱 위축됐다. 지난달 5조3438억원으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한 회사채 발행금액은 이달 들어 1조8192억원으로 더 쪼그라 들었다. 이는 작년 같은 기간(3조8138억원)의 반토막 수준이기도 하다. 그만큼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에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다. 자금경색으로 빚어진 시장 불신이 돈이 급한 회사들의 자금 조달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초우량 등급인 한전채가 시중의 유동성을 대거 흡수하고 있는 것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실제 한전채는 올해 들어서만 23조3500억원어치가 발행돼 이미 작년 연간 발행규모(10조3200억원)의 두 배를 넘어섰다. 특히 1조5900억원이 채권시장의 유동성 위기가 본격화된 이달 발행됐는데 가장 최근 발행일인 지난 20일 표면금리는 연 5.9%에 달했다.
회사채 3년물 금리를 추월한 지는 어언 한달이 다 돼 간다. 한전채의 신용등급은 초우량 등급에 해당하는 트리플A(AAA)다. AA 등급 이하 회사채가 설 곳을 잃은 배경이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도 지난 12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한전채나 은행채 등 초우량 등급의 발행량이 늘어나면서 그 아래 회사채들이 구축(驅逐)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아직은 신용위험이 아닌 유동성 문제라고 파악한다"고 말했다.
한전이 이처럼 시장에 채권 폭탄을 투척하고 있는 건 국제 에너지 가격 폭등을 필두로 '팔수록 손해'인 적자 구조가 굳어졌기 때문이다. 한전의 올해 상반기 전력도매가(SMP)는 ㎾h(킬로와트시)당 169원이었지만, 판매단가는 110원으로 59원 적자가 발생했다. 같은 기간 한전은 14조3033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최근 SMP가 kWh당 270원을 넘어선 점을 감안하면 앞으로 적자와 한전채 발행규모는 더욱 불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지금은 이마저도 발행에 성공하면 다행인 상황이다. 전일 한전채의 유찰 건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날 한전채 3년물은 2000억원에 대한 입찰을 진행했지만 목표 금액을 채우지 못하고 최종 유찰됐다. 2년물의 경우 2000억원 발행을 계획했지만 800억원어치만 겨우 채워 시장에 나왔다. 표면금리는 연 5.99%로 가까스로 5%대를 수성했다. 그만큼 자금시장의 심리가 얼어있다는 의미다.
증권사 PF ABCP, 연말까지 '27조' 만기
연이어 도래하는 부동산 PF ABCP 만기도 시장의 뇌관이긴 마찬가지다. 레고랜드 디폴트 선언이 부동산 PF 시장은 물론 증권사 건전성과 금융권 전반의 유동성을 위협하는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어서다.
이들 PF ABCP는 당장 현금화가 어려운 부동산이나 채권에 대해 이를 담보로 증권사 등이 보증을 서고 발행한 일종의 증권이다. 이에 해당 ABCP 만기가 돌아왔을 때 차환에 실패하면 증권사가 이를 떠맡아야 한다.
나이스신용평가에 따르면 증권사가 매입 보장하거나 신용보강한 PF ABCP와 자산담보부단기채(ABSTB) 가운데 당장 이달 만기인 금액은 6조7013억원이다. 다음 달에는 10조7297억원, 12월에는 9조7574억원어치가 차례대로 만기를 맞는다. 내년 1월에는 그 규모가 10조7618억원에 이른다. 최근 반년새 최대치다.
부동산 PF ABCP 신용보강은 과거 건설사들이 주도했다. 그러나 2010년대 후반부터 국내 증권사들이 높은 신용도와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여기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그 결과 증권사들의 PF 채무보증 수수료는 절대적인 수익원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레고랜드 사태 이후 시장의 자금경색이 심화되면서 차환에 실패한 사업장이 잇따르고, 최근에는 증권사가 이들 물량을 직접 사들이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이명준 나이스신용평가 SF평가본부 선임연구원은 "아직은 증권사가 보유하고 있는 유동성으로 차환발행 물량이 어렵게 소화되고 있지만, 이런 시기가 더 길어지면 차환발행 중단 등으로 증권사의 신용위험까지 커지게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백두산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레고랜드 이슈로 유동성 프리미엄이 확대되면서 PF ABCP 조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매입 확약 등 채무보증으로 PF 익스포저(위험노출액)에 직면한 증권사들의 유동성 관리 필요성은 그만큼 커졌다"고 설명했다.
금융투자업계도 분주해졌다. 금융투자협회는 전일 미래에셋증권,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삼성증권, KB증권, 메리츠증권, 하나증권, 신한투자증권, 키움증권 등 국내 종합금융투자사업자 9곳의 최고경영자(CEO)들을 소집해 '제2의 채안펀드'를 조성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상대적으로 위험이 덜한 이들 종투사가 자금을 대서 유동성 우려가 있는 중소형 증권사들을 지원하는 내용이 이날 논의의 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