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5년간 국내 펀드자금 77%가 피투자기업의 주주총회 안건에 대해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의결권 행사는 주주 고유 권한이지만, 여러 투자자들의 자금이 모아진 펀드는 운용사가 투자자(수익자)를 대신해 의결권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자본시장법에선 운용사의 책임있는 의결권 행사를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거수기 오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당국이 내년부터 의결권 공시 강화 대책을 시행키로 한 가운데 의결권 행사 관행이 바뀔지 관심이 모아진다.
10곳 중 7곳이 찬성 몰표
6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자산운용사들의 올해 1~6월 의결권 행사시 안건 찬성 비중은 70.1%으로 집계됐다. 반대 비율은 3.9%뿐이었다. 중립 비율은 18.8%로 최근 5년 중 가장 높았고, 아예 의결권을 행사하지 않은 비율도 7.2%로 반대비율보다 높았다.
최근 5년간 추이를 살펴보면 찬성비율은 평균 77.7%로 집계됐다. 중립 의견을 표시하거나 의결권을 아예 포기한 경우도 16.4%에 달했다. 반대는 5.9%에 불과했다.
펀드는 투자자(수익자)가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금을 굴리는 운용사가 수익자 대신 의결권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자본시장법(87조)에선 운용사들은 투자자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집합투자재산에 속하는 주식 의결권을 충실히 행사할 의무를 부여하고 있다.
따라서 운용사의 소극적 의결권 행사는 선관주의 의무를 져버리는 행위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투자업계에서는 다만 운용사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가 어려운 배경으로 피투자기업과의 관계 뿐 아니라 시장 관행을 꼽는다.
한 펀드 매니저는 "대형운용사에선 대부분 자문기구를 내부에 두고 있어 과거보다 의결권 행사가 까다로워졌다"면서도 "결국 하나의 회사 이름을 걸고 나오는 의견이기 때문에 구조상 한 운용사가 여러 펀드에서 다양한 의견을 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A운용사가 운용하는 a, b, c펀드가 삼성전자를 편입하고 있을 경우 주총 안건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설명이다.
공시 강화로 거수기 오명 벗을까
당국도 이같은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책임있는 의결권 행사를 연초부터 당부해왔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2월 자산운용사 최고경영자(CEO)들을 소집해 "자산운용사가 스스로 깊은 고민을 통해 책임있는 의결권 행사 방향을 모색하고 ESG 기업을 적극 발굴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금감원은 자산운용사의 의결권 행사와 관련한 공시의무를 강화하기로 했다. 공시 양식을 통일하고, 금융투자업규정시행세칙 개정을 통해 오는 2024년 주총부터 적용할 계획이다. 이는 펀드 투자자들이 운용사의 의결권 행사 내역을 손쉽게 감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관련기사: 깜깜했던 자산운용사 의결권 행사내역…알기 쉬워진다
업계에서도 기대감이 흘러나온다. 펀드 매니저는 "원칙을 지키기 어렵게 만들었던 현실적 제약도 당국 계도를 통해 정상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한 자본시장 전문가는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펀드가 신탁형태이기 때문에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려면 거쳐야 할 과정이 많다"며 "우선 의결권 행사에 대한 설명 의무를 높여 적극성을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