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 김용민 기자) |
“정식 먹어요.” 메뉴판을 들고 온 일식집 주인이 다짜고짜 메뉴를 추천한다. “요즘 뭐가 좋으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단골도 아니다. 점심 약속 때문에 처음 들른 식당이다. 날이 쌀쌀해 얼큰한 매운탕이 당기는 날이었다. “대구탕을 먹겠다”고 하니, 주인은 퉁명스럽게 메뉴판을 놓고 사라졌다.
점심 정식 2만5000원, 특 정식 3만원, 대구탕 1만7000원. 메뉴판을 펼쳐보니 정식 가격이 대구탕보다 훨씬 비싸다. 종종 제철 음식이라며 슬쩍 비싼 메뉴를 권하는 식당도 있지만 이 식당 주인의 상술은 거칠고 노골적이라 불편했다.
잠시 뒤 이 식당을 예약한 일행이 우리가 왜 ‘호갱님’이 됐는지 설명해줬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 이름으로 예약을 잡았기 때문이란다. 선뜻 이해가 안 됐다. 보통 회사 이름으로 예약하는 손님은 접대나 회식이 잦아 식당의 VIP가 된다. 하지만 주류회사 직원은 예외란다.
“그래도 반말 안 해 다행이네요. 식당 주인에게 주류회사 직원은 ‘을’입니다.” 국내 3대 주류회사 중 한 곳에 다니는 일행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회사 이름으로 예약을 잡았고, 그 순간부터 우리는 ‘손님’이 아닌 ‘을’이 됐다.
식당 주인에게 주류회사 직원은 냉장고에 술을 한 병이라도 더 넣기 위해 안달하는 영업사원으로 보일 뿐이었다. 주류회사 직원이 어느 부서에 있건, 누구와 함께 식당을 찾았건 상관없어 보였다.
현장에서 영업사원들이 겪은 서러움은 더 하단다. 영업부서에 근무했던 또 다른 일행은 “호프집이 바쁜 시간이면 영업직원이 서빙은 기본이고, 주방에서 설거지까지 한다”고 토로했다.
이날 음식 맛은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맛있었다. 재료는 신선했고, 국물은 시원했다. 찬도 깔끔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빈 테이블이 없었다. 이렇게 장사가 잘되니 주류회사 영업사원이 더 쩔쩔맬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요즘 운전기사를 상습적으로 폭행한 김만식 몽고식품 회장 때문에 시끄럽다. 김 회장은 운전기사의 낭심을 구둣발로 걷어차고, "개자식아" 등 욕을 퍼부었다. 때론 직원들을 '돼지', '병신'으로 불렀다. 월급쟁이라면 댓글 달고 싶어지는 뉴스다.
라면 상무, 슬리퍼 회장, 신문지 회장, 땅콩 회항 등 기업 고위층이 저지른 ‘갑질’에 여론은 더욱 싸늘해진다. 그런데 이들의 ‘갑질’에서 폭행과 폭언, 모욕 등을 빼고 나면 우리에게 익숙한 ‘알맹이’만 남게 된다. 바로 누군가를 하대(下待)하는 문화다.
누구에게나 하루에 몇 번씩 ‘갑질’의 기회는 찾아온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에게 반말을 툭 던지거나, 전화 상담원에게 무심코 짜증을 낸 사람은 누구인가? 갑과 을의 경계는 모호하다. 손님 앞에서 늘 ‘을’인 식당 주인에게도 이날 점심에 ‘갑질’의 기회가 찾아왔을 뿐이다. 우리는 어쩌면 ‘갑질’을 인식하지 못한 채 누군가를 스스럼없이 하대(下待)하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