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참 좋아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술자리를 좋아한다. 좋은 사람들과 술을 앞에 두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그 분위기가 참 좋다. 물론 그렇게 먹다 보면 대부분 과음으로 빠진다. 다음날 출근길에 '내가 다시 술을 먹으면 짐승이다'를 수없이 되뇌지만 언제나 저녁이 되면 '짐승'이 돼있다.
처음 250㎖ 캔을 접하고는 피식 웃었다. 솔직히 '이런 걸 누가 먹겠어'라는 생각이 앞섰다. 두세 모금이면 끝날 듯 보였다. 나처럼 술을 대량으로 마시는 사람에게 250㎖ 캔은 그야말로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양이다. 당연히 주목받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오비맥주의 카스 250㎖ 캔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한 손에 쏙 들어가는 디자인으로 SNS에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대형마트에선 물량이 달려 아우성일 정도라고 한다. 놀랄 일이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작은 캔이 뭐라고 이토록 열광을 하는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래서 찾았다. 카스 250㎖ 캔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이를 물색했고 마침내 지난 12일 서울 삼성동 오비맥주 본사에서 그를 만났다. 박향례 오비맥주 이노베이션팀 이사가 그 주인공이다. 박 이사는 현재 오비맥주에서 카스 전체 라인업에 대한 브랜딩 작업은 물론 신제품 개발 등을 담당하고 있다.
첫인상은 단아했다. 차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사진을 찍는 내내 수줍어 어쩔 줄 몰라했다. 인터뷰 경험이 많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인터뷰가 진행되자 태도가 돌변했다. 특히 카스 이야기를 풀어놓을 때는 첫인상과 달리 자신감에 넘치고 당당했다. 내심 놀랐다.
▲ 박향례 오비맥주 이노베이션팀 이사.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박 이사는 3년 6개월 전 오비맥주에 합류했다. 그전엔 글로벌 리서치 회사에서 근무했다. 주로 소비자 트렌드와 성향을 파악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런 이력 덕분이었을까. 카스 250㎖ 캔에는 소비자들의 니즈와 현재 주류 트렌드가 오롯이 담겨있었다.
박 이사는 "소비자 니즈와 트렌드 파악을 위해 자주 조사를 하는 편"이라며 "그런 와중에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춘 새로운 아이템을 고민하다가 최근 혼술, 홈술족이 늘어나고, 여성들의 음주 참여율이 높아지는 추세에 착안해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식사 후 맥주 딱 한 모금만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기존 500㎖ 캔의 경우 그렇게 마시기엔 부담스럽다"면서 "이런 니즈가 의외로 많다는 점을 파악했고 제품으로 연결해보자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박 이사는 저녁 대신 맥주 500㎖ 한 캔을 마실 때도 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양이 부담스러웠다. 이런 본인의 경험도 제품에 그대로 녹아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박 이사는 "250㎖ 소용량 캔은 기존 캔맥주가 가지고 있던 단점도 극복할 수 있다"라며 "그동안 캔맥주는 용량이 커 장점인 시원함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250㎖ 제품은 쉽게 차가워지고 마시는 동안에도 쉽게 식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사실 처음 카스 250㎖ 캔을 기획해 경영진에 보고 했을 때 반대가 무척 심했다고 한다. 박 이사는 "현재는 중국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프레데리코 프레이레(한국이름 김도훈) 사장이 한 모금짜리 맥주를 어디다 쓰겠냐며 강하게 반대했다"면서 "하지만 지속적으로 설득했고 여성들이 바라보는 지점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 출시할 수 있었다"라고 전했다.
▲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그는 "이후 한국에 잠깐 들린 김 사장이 카스 250㎖ 캔의 성공 스토리를 중국에서도 잘 듣고 있다고 했고, 그래서 그것 보시라 성공한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씀드렸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일반적인 통념을 깨고, 소비자 니즈에 맞춘 제품 출시가 성공으로 이어진 셈이다.
사실 250㎖ 캔 맥주를 처음 내놓은 건 경쟁사였다. 오비맥주는 후발주자였던 만큼 수요층 공략에 집중했다. 박 이사는 "어떤 포인트로 이 제품을 소개해야 하는지, 수요층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그렇게 고민한 부분이 소비자들에게 잘 어필한 것 같다. 그것이 카스 250㎖ 캔의 성공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카스 250㎖ 캔은 초기엔 대형마트 등에서만 선보였다. 시장성을 확신할 수 없어서다. 대형마트에서 주력은 용량이 큰 제품들이다. 따라서 250㎖ 캔은 매대 위치부터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스스로 250㎖ 캔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앙증맞은 사이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박 이사는 "회사 홈페이지에서도 카스 250㎖ 캔을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문의가 빗발쳤다"라고 소개했다.
SNS에 카스 250㎖ 캔을 들고 찍은 사진이 올라가면 댓글이 폭발적으로 달렸다. '어디서 샀느냐?', '왜 우리 동네에선 팔지 않느냐', '판매처를 더 늘려달라'라는 등의 요구가 많았다. 이에 오비맥주는 대형마트뿐만 아니라 슈퍼마켓까지 판매 채널을 확장했다. 편의점은 아직 들어가지 않는다. 소비자들이 편의점에서 찾는 주력제품이 달라서다.
박 이사는 카스 전 제품의 브랜드를 관리한다. 청량하고 젊은 이미지를 위해 파란색으로 라벨을 바꾼 것도 그의 작품이다. 여러 카스 제품군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제품을 물었다. 그러자 그는 "어느 것 하나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며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더니 "아무래도 병제품이 가장 애착이 많이 간다"라고 답했다.
▲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
그는 "카스 병제품은 다른 카스 제품의 근간"이라면서 "특히 병에 신경을 많이 썼다. 다른 브랜드가 공병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카스 브랜드를 각인했고 라벨도 'V자' 형태로 만들었다. 카스가 지금의 블루패턴을 갖기까지 유난히 힘이 많이 들었다"라고 설명했다.
박 이사는 최근에도 소비자 트렌드 조사에 몰두하고 있다. 소비자 니즈 변화를 실시간으로 읽어내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이는 곧 신제품 개발과 기획에 좋은 자양분이 된다. 박 이사는 "특히 컨슈머 인사이트를 많이 본다. 이종산업에서 벤치마킹할 대상도 많이 보고 있다. 최근엔 막걸리의 변화가 다양하다. 재료와 맛, 도수 등에 대한 부분들도 많이 연구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치자 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아무래도 인터뷰는 누구에게나 부담이다. 인터뷰 내내 긴장한 듯 보였던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돌았다. '누가 먹겠냐'라며 평가절하했던 250㎖ 캔 속엔 트렌드를 제대로 읽어낸 그의 안목과 최근 소비자 니즈가 그대로 담겨있었다. 인터뷰를 하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늘 배운다. 이번에도 또 하나 배웠다. 자신의 경험에만 기댄 편견은 쉽게 오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