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식품업계에선 왕좌의 자리를 놓고 지키려는 자와 뺏으려는 자의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그간 쉽게 흔들리지 않았던 부동의 1위 그리고 이를 따라잡으려는 2위의 '기싸움'은 두 업체 간 단순한 순위 경쟁을 넘어 관련 산업 전반에 새로운 자극을 주면서 소비자들에겐 또다른 흥밋거리를 선사했다. 과연 새해엔 왕좌의 주인공이 바뀔 수 있을까. 제품별로 경쟁 판도를 전망해본다. [편집자]
'영원한 강자는 없다'라는 말이 있다. 오랜 기간 한 분야에서 최고의 지위를 누릴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경쟁자가 나타나 왕좌를 위협할 수 있어서다. 왕좌에 앉은 자는 늘 경쟁자들을 두려워한다. 언제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왕좌에 앉은 자와 그 자리를 좇는 자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지난 19년간 왕좌의 주인이 바뀌지 않은 곳이 있다. 죽 시장이다. 국내 죽 시장의 절대 강자는 동원이다. 국내 죽 시장은 19년간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랬던 죽 시장이 작년부터 요동치기 시작했다. CJ제일제당이 순식간에 동원을 턱 밑까지 쫓아왔다. 19년간 조용했던 죽 시장은 이제 치열한 전쟁터가 됐다.
◇ '동원 천하' 죽 시장
국내 죽 시장은 동원 천하다. 1992년 동원은 국내 최초로 즉석죽 브랜드인 '양반죽'을 선보였다. 그리고 2001년 시장점유율 1위에 올랐다. 이후 지난 19년 동안 점유율 50%를 상회하며 압도적인 강자로 자리 잡았다. 작년에는 점유율이 60.2%에 달했다. '즉석죽=양반죽'이라는 이미지가 소비자들의 뇌리에 깊게 자리 잡았다.
즉석죽 시장은 동원이 개척한 것과 다름없다. 사실 죽은 집에서 만들어 먹기 번거로운 음식이다.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동원은 이를 간단한 조리로 가능하게 했다. 병문안을 갈 때도, 여행을 갈 때도 양반죽은 늘 든든한 파트너 역할을 했다. 죽은 밥처럼 주식은 아니지만 늘 니즈가 있는 제품이다. 동원은 이를 선제적으로 파악해 상품화했다.
국내 죽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이다. 식품업계의 주요 트렌드 중 하나인 1, 2인 가구 증가와 맞물려있다. 즉석죽은 1, 2인 가구가 손쉽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따뜻하고 다양한 종류의 죽을 맛볼 수 있다. 양반죽은 용기형 즉석죽이다. 한 그릇 뚝딱 비울 수 있으면서도 든든하다는 점이 소비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동원이 즉석죽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자 오뚜기 등 여러 식품업체들도 즉석죽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 덕에 국내 죽 시장은 점점 파이가 커지기 시작했다. 업체들은 다양한 맛의 죽을 선보이면서 경쟁에 돌입했다. 동원 양반죽의 종류만 해도 20여 종에 달한다. 동원은 약 3000평 규모의 양반죽 전용 라인도 갖추고 있다. 동원은 지속적인 투자를 통해 점점 커지는 즉석죽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왔다.
◇ CJ제일제당의 저력
동원의 장기집권 체제가 이어지던 지난 2018년, 즉석죽 시장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국내 식품업계의 강자이자 HMR(가정간편식) 시장을 장악한 CJ제일제당이다. CJ제일제당은 즉석죽 시장에 '비비고'브랜드를 앞세웠다. 동원 양반죽의 용기형 즉석죽과 달리 '파우치형' 즉석죽을 내놨다. 초기에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곧 죽 시장에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금세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2018년 시장점유율 4.3%로 출발한 비비고죽은 출시 1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무서운 속도로 성장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 업계 2위였던 오뚜기를 제쳤고, 심지어 지난 5월에는 부동의 1위인 동원 양반죽(39%)을 1% 포인트 차이로 바짝 뒤쫓기도 했다. CJ제일제당은 비비고죽을 앞세워 국내 즉석죽 시장에 새로운 강자로 발돋움했다.
CJ제일제당의 파상공세에 동원의 즉석죽 점유율도 급격하게 하락했다. 작년 60.2%에 달하던 점유율은 9월 현재 44.3%까지 떨어졌다. 반면 CJ제일제당은 33.4%로 동원을 바짝 추격하고 있다. 3위로 내려앉은 오뚜기와는 21.3%포인트 차이로, 이제 국내 즉석죽 시장은 동원과 CJ제일제당이 양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비비고죽이 단기간에 시장을 가져갈 수 있었던 건 파우치 덕분이다. 파우치 죽은 용기형과 비교해 넉넉한 용량이 강점이다. 전자레인지로 조리가 쉽고 죽 전문점 제품에 뒤지지 않는 맛과 품질을 갖췄다는 평가다. 여기에 HMR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는 CJ제일제당의 기술력이 더해지면서 소비자들의 만족도를 끌어올렸다는 평가다.
◇ 왕좌의 주인 바뀔까
사실 CJ제일제당은 내심 올해 안에 동원을 제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만큼 비비고죽의 인기는 대단했다. 동원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동원은 CJ제일제당과 마찬가지로 파우치죽을 선보이며 반격에 나섰다. 덕분에 동원은 CJ제일제당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CJ제일제당이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어서다.
최근 CJ제일제당은 내년 비비고죽을 1000억원대 메가 브랜드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선언했다. 햇반, 비비고 국물요리 등 상온 HMR R&D·제조기술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어 시장을 확실히 가져가겠다는 전략이다. 이미 파우치죽 시장에서 점유율 80%를 기록하고 있는 만큼 파우치죽을 전면에 내세우겠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궁극적으로 즉석죽을 '일상식'으로 자리매김 시킨다는 것이 CJ제일제당 전략의 핵심이다.
동원도 대응에 나섰다. 동원은 '가마솥 방식'을 내세웠다. CJ제일제당의 HMR 기술 응용에 대한 맞불인 셈이다. 동원은 죽을 미리 끓여놓고 용기에 담는 방식이 아니라 쌀과 각종 원재료를 함께 끓여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통해 쌀알이 뭉개지지 않고 식감이 살아있으며 재료 본연의 깊은 맛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동원이 내세우는 양반 파우치죽의 강점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 30여 년간 잠잠했던 국내 즉석죽 시장이 새로운 플레이어의 등장으로 갑자기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면서 "현재 동원과 CJ제일제당뿐만 아니라 풀무원, 오뚜기 등도 반격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는 만큼 향후 국내 즉석죽 시장은 더욱 크게 요동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