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신라가 김기병 롯데관광개발 회장과 3년째 소송전을 이어가고 있다. 특이하게도 동화면세점을 서로 갖지 않겠다면서 떠넘기는 소송이다.
소송이 장기화된 이유는 결국 양 측 모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다. 김 회장도 동화면세점을 넘길 수밖에 없고, 호텔신라은 이를 받을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상황이 꼬여도 제대로 꼬여있다.
◇ 급한 불 꺼줬는데 불똥 튄 지분계약
동화면세점은 지난 1973년 설립된 국내 최초 서울 시내 면세점으로 김 회장도 그만큼 애착이 큰 회사다. 하지만 김 회장은 2013년 5월 동화면세점 주식 19.9%를 호텔신라에 600억원에 매각했다. 이유는 롯데관광의 용산개발사업의 부실 때문이다.
계약 당시 양측은 당시 주식매매계약 조건으로 계약체결일로부터 3년이 지난 후 호텔신라가 투자 원금과 이자를 보장하는 풋옵션(매도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를 위해 김 회장이 보유한 나머지 동화면세점의 지분 30.2%를 담보로 설정했다. 풋옵션을 근거로 볼 때 해당 계약을 단순한 지분투자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시 김 회장은 용산사업의 실패로 급히 현금이 필요했고, 호텔신라가 손을 내밀어 준 그림이다.
갈등은 계약 3년 뒤 호텔신라의 풋옵션을 김 회장이 거부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호텔신라는 지분 인수 3년 뒤인 2016년 6월 풋옵션을 행사해 주식을 재매입하라고 김 회장 측에 요구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하고, 동화면세점 경영권을 넘기는 조건으로 변제를 대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담보였던 동화면세점 지분 30.2%도 내놓겠다고 맞섰다.
그러자 호텔신라는 지난 2017년 김기병 롯데관광개발 회장을 상대로 주식매매대금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그 후 벌써 3년째로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 1심이 진행 중이다.
◇ 호텔신라, 소송전 장기화 오히려 유리
호텔신라 입장에서 가장 최선의 시나리오는 김 회장이 풋옵션을 받아들여 지분을 다시 사는 것이다. 하지만 김 회장의 입장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재 소송전을 계속 끌어가는 것이 유리하다. 동화면세점은 중소중견 면세점으로 대기업인 삼성 계열사 호텔신라는 경영이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호텔신라가 풋옵션을 행사하지 못하고 나머지 지분 30.2%까지 다 떠안으면 동화면세점 지분율이 50.1%로 오른다. 그러면 동화면세점이 호텔신라의 자회사로 편입된다. 중소중견 면세점은 경영이 금지된 만큼 곧바로 시장에 내놓아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문제는 동화면세점 매각이 여의치 않다는 데 있다. 동화면세점은 현재 400억원 규모의 적자가 쌓여 있는 데다 업황도 부진하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엔 코로나19 사태로 면세점 M&A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업계에선 애초 호텔신라의 동화면세점 투자 결정이 섣불렀다는 의견이 많다. 당시에도 실적이 좋지 않았는데 무리하게 지분투자에 나섰다는 지적이다. 신세계의 시내면세점 진출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호텔신라는 이미 이 투자분에 대한 손실을 확정해 재무제표에 반영했다. 지난해 감사보고서 기준 총 599억원을 동화면세점 투자 관련 손상차손으로 기타영업외비용 처리했다. 호텔신라 관계자는 "돈을 줄 수 없다는 김 회장 측의 입장은 여전히 변함이 없는 것 같다"면서 "관련 소송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 김 회장, 더 큰 '드림' 위해 동화면세점 포기
호텔신라 측은 김 회장의 변제능력이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김 회장이 보유 중인 롯데관광개발의 주식가치만 1600억원이 넘는다. 롯데관광개발의 지분을 팔거나 담보로 제공하면 호텔신라의 풋옵션을 받아주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김 회장이 이 요구를 받아들이긴 현실적으로 어렵다. 김 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롯데관광개발이 제주에서 추진 중인 대규모 복합리조트 사업인 드림타워에 대규모 자금이 필요해서다. 이 사업은 총투자비만 8000억원이 넘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당초 작년 9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아직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다.
롯데관광개발은 중국 녹지그룹과 6대 4의 지분율로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롯데관광개발은 59.02% 자기지분에 대한 건설비용과 리조트 인테리어를 맡는다. 녹지그룹은 리조트 건물 전체를 시공하면서 자기지분 40.98%에 대한 건설비용과 호텔레지던스의 분양을 맡는다.
전체 리조트 건설은 녹지그룹이 책임시공 형식으로 맡고 있어 롯데관광개발이 자기지분만큼 중도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중도금과 잔금의 총 액수는 4680억원에 달한다. 추가 인테리어 비용도 2186억원가량 들어갈 예정이다. 계약금과 이자비용, 인테리어 설계비, 취득세 등 비용을 모두 합치면 롯데관광개발이 드림타워에 투자하는 총비용만 8440억원에 달한다. 공사가 완료되고 리조트가 운영을 시작한 이후에도 호텔레지던스 분양자들에게 향후 20년 동안 분양가의 5%를 매년 확정수익으로 지급해야 한다.
그러자 롯데관광개발은 현금 동원에 사활을 걸었다. 김 회장 입장에선 동화면세점을 포기하더라도 현금지출을 막는 게 급선무다. 실제로 롯데관광개발은 드림타워 투자금 조달을 위해 2017년 4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를 발행했으며 2018년에는 유상증자를 통해 2158억원을 마련했다. 작년엔 해외에서 6000만달러(약 700억원) 규모의 전환사채도 찍었다.
◇ 롯데관광개발, 위기대응 시험대
롯데관광개발의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1년 안에 갚아야 할 유동부채가 2501억원에 달한다. 지난해 초만 해도 유동부채 규모가 745억원에 불과했는데 드림타워 잔금 부담이 크다. 또 유동자산은 534억원 수준인데 이중 현금성 자산은 163억원에 불과하다. 최근엔 연 4.5% 수준의 단기차입으로 인테리어 비용 1000억원을 마련하기도 했다. 국내 3대 신용평가사들은 롯데관광개발에 대한 신용등급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회사채를 발행할 수 없다는 얘기다.
다행히 급한 불은 껐다. 롯데관광개발은 최근 신한은행(3500억원)과 한국금융투자(3000억원)로부터 총 65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해주겠노라는 대출확약서(LOC)를 받았다. LOC의 유효기간은 각각 신한금융투자 10월 31일, 한국투자증권 3개월이다. 대출 담보는 드림타워 건물과 토지며 대출조건은 자금시장에 중대한 부정적인 영향이 존재하지 않고 복합리조트 오픈 시점을 결정하는 조건이다. 대출이 실행되면 남은 잔금과 인테리어 비용 등이 해결된다.
다만 향후 고정적으로 나갈 비용은 여전히 부담스럽다. 이자비용과 수익형 레지던스호텔 분양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확정수익, 대출에 따른 이자 등 자금이 계속 필요하다. 호텔과 리조트 사업은 고정비가 큰 업종이어서 대규모 자금조달에 따른 이자비용이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1600세대가 분양된 수익형 호텔 분양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돈과 지난해 발행한 전환사채 그리고 이번 LOC에 따른 이자비용을 더하면 매년 1000억원에 가까운 고정비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된다.
롯데관광개발 측은 리조트와 카지노가 개장하면 충분히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만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리조트 개장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게다가 가장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카지노 사업의 경우 허가를 위한 제주도 카지노 산업 영향평가도 아직 열리지 않았다. 카지노가 열리더라도 기대만큼 수익을 내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지난해 제주지역에서 가장 높은 매출을 올린 파라다이스제주의 1년 매출은 402억원 규모였다.
그러다 보니 롯데관광개발이 덩치에 비해 지나치게 큰 사업만 벌이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리조트업계 관계자는 "안 그래도 다소 무리한 프로젝트였는데 최근 코로나19 등 악재가 이어지고 있어 롯데관광개발의 위기 대응능력이 시험대에 올랐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