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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한끗]①새우깡 '롯데 기원설'의 진실

  • 2020.12.28(월) 14:25

신춘호 회장, 형 신격호 회장과 라면 사업으로 이견
'롯데공업' 독립…농심라면·새우깡으로 성공 발판

역사적인 사건에는 반드시 결정적인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역사책의 내용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때 다른 결정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는 말이 익숙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은 꼭 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많은 제품에도 결정적인 '한 끗'이 있습니다. 특히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제품들의 경우 결정적 한 끗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절묘한 한 끗 차이로 어떤 제품은 스테디셀러가, 또 어떤 제품은 이름도 없이 사라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비즈니스워치에서는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제품들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려 합니다. 결정적 한 끗 하나면 여러분들이 지금 접하고 계신 제품의 전부를, 성공 비밀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럼 이제부터 저희와 함께 결정적 한 끗을 찾아보시겠습니까. [편집자]

#프레시맨의낭만 #막걸리에퐁당 #술취한비둘기

살다 보면 늘 후회되는 순간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저는 대학 시절이 가장 후회스럽습니다. 그때 좀 더 열심히 공부할 걸 하는 후회가 지금도 가끔 밀려듭니다. 어른들이 "공부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하실 때 '그런 게 어딨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들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그런 주옥같은 말씀들은 꼭 후회할 때 떠오르죠. 제 대학 시절이 그랬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꽉 짜인 틀 속에서 생활하다가 대학생이 되면서 갑자기 밀려드는 자유에 갈피를 못 잡았습니다. 학기 중에는 늘 학교 수업에 치여 다른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방학 때는 학원과 독서실에서 사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은 달랐습니다. 무한한 자유-물론 고등학교와 비교해 상대적인 자유죠-가 주어졌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몰랐습니다. 

대학생이 되자 그 자유에 취해 살았습니다. 1교시 수업이 있던 어느 봄날. 아침 햇살을 만끽하며 교문을 들어섭니다. 오늘 수업이 있는 강의실을 찾아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좋았습니다. '이번 학기 열심히 해서 부모님께 장학금이라는 것을 보여드리리라!' 마음먹으며 호기롭게 강의실로 향합니다. 하지만 악마는 늘 이런 순간에 등장합니다.

저 멀리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고개를 돌려보니 잔디밭에 과 선배가 앉아있습니다. "일루와". "어, 형 안녕하세요. 저 1교시 수업이 있어서". "알아, 나도 그 수업이야. 여기 앉아서 한 잔만 받고 나랑 같이 들어가". 속으로 '술 먹고 수업을?'. 그때만 해도 순진했습니다. 1학년이었으니까요. 선배의 추상같은 말에 제 발걸음은 이미 잔디밭으로 향합니다.

선배가 마련해둔 술상은 막걸리 한 통과 새우깡 한 봉지. "앉아. 대학 생활은 말이지"로 시작하는 선배의 말을 들으며 잔을 꺾습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식도를 타고 들어가는 막걸리는 기가 막힙니다.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두 잔이 세 잔이 될 무렵 문득 시계를 보니 9시가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 동기들이 주변에 앉아있습니다. 분명 다 같이 1교시 수업을 듣는 친구들인데.

삽화=김용민 기자 / kym5380@

심지어 교수님도 지나가십니다. 갑자기 선배 형이 벌떡 일어섭니다. "교수님, 제가 애들 데리고 수업 시간에 맞춰 들어갈게요!". 그러자 교수님은 씩 웃고 지나가시며 "안 믿어!" 하십니다. 선배는 상습범이었던 겁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 눈앞에서 벌어집니다. 그날 결국 제 동기들은 대부분 수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해는 중천에 떴고 저희는 잔디밭에서 부어라 마셔라를 하고 있습니다.

'아! 이게 대학 생활의 낭만이구나'. 네, 그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때 선배의 유혹을 뿌리치고 수업에 들어갔던 동기들은 다들 지금 사회에서 한 자리씩 합니다. 당연한 결과죠. 아무튼 전 그래도 그 '일탈'이 좋았습니다. 희한하게도 술자리 인원은 줄지가 않습니다. 물론 중간에 수업에 뛰어가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꼭 다른 사람이 채웁니다. 신기한 일이죠.

아침부터 벌어진 술자리는 밤늦게 끝납니다. 누가 술값을 내는지는 모릅니다. 대학교 1학년이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 멤버 체인지한 선배들이 내는 것이겠죠. 선배들이 그랬습니다. "1학년은 원래 차비만 있으면 학교 다니는 거야". 정말 그랬습니다. 그렇게 한 학기를 보냈으니 학점이 좋을 리 만무합니다. 장학금은 무슨. 살아서 학교를 다닌 것만도 장합니다.

잔디밭에서 막걸리를 마실 때면 선배들은 늘 진기명기를 보여주곤 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한 선배 형이 "너, 비둘기가 막걸리에 절은 새우깡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라고 물었습니다. "아뇨". "내가 보여줄게". 그 선배 형은 종이컵에 담긴 막걸리에 새우깡 하나를 푹 담급니다. 그러더니 그 새우깡을 옆으로 휙 던집니다. 그러자 잔디밭에서 호시탐탐 새우깡을 노리던 비둘기들이 달려듭니다. 장관입니다.

누가 비둘기를 평화의 상징이라고 했습니까? 사람이나 비둘기나 날랜 놈이 늘 이깁니다. 새우깡을 둘러싼 비둘기들의 혈투는 정말 대단합니다. 결국 제일 빠릿빠릿한 놈이 채갑니다. 엄청 빠릅니다. 그리고는 혼자 저 멀리 홀로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새우깡을 탐닉합니다. 신기한 일은 지금부터입니다. 조금 지나자 그 비둘기의 걸음걸이가 이상합니다. 마치 술 취한 사람마냥 갈지(之)자로 걷습니다. 신기합니다.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과학적으로 비둘기도 술에 취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니겠죠? 제가 취해서 헛것을 본 것이겠죠? 막걸리에 절은 새우깡을 먹은 건 비둘기가 아니라 저였겠죠? 지금도 미스터리입니다. 지금도 새우깡을 보면 그때 생각이 납니다. 내가 취했던 건가? 정말 비둘기가 취했던 건가? 아니면 둘 다 취한 건가? 술 취한 비둘기 사건은 여전히 '미제(未濟)'로 남아있습니다.

#라면이갈라놓은형제 #형이야속했다 #롯데새우깡의비밀

새우깡은 '국민 스낵'입니다. 스낵류가 없던 시절 새우깡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새우깡은 농심의 주력제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첫 새우깡은 농심이 아니라 '롯데 새우깡'이었습니다. 새우깡의 시작이 농심 새우깡이 아니라 롯데 새우깡이었던 데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라면을 둘러싼 형제간의 갈등 때문입니다.무슨 소리냐고요? 이 이야기를 알기 위해서는 시계 바늘을 60년대로 돌려야 합니다.

일본 롯데 무역부장이었던 신춘호 현 농심그룹 회장은 당시 국내 시장에 라면을 출시하고 싶어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후 먹을 것이 귀했던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의 인기가 높았던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국내에는 1963년 최초로 출시된 삼양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을 때였습니다. 일본에서 인스턴트 라면의 성공을 봤던 신춘호 회장에게 라면은 매력적인 아이템이었습니다. 한번 해볼 만 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에 신춘호 회장은 형인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에게 라면 시장 진출 계획을 밝히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예상외로 신격호 회장의 반대는 거셌습니다. 동생의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했죠. 신격호 회장은 삼양이 차지하고 있는 국내 라면 시장에 롯데가 진출해봐야 손해만 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형의 예상치 못한 강한 반대에 부딪힌 신춘호 회장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오기가 생긴 그는 결국 홀로 라면 사업 진출을 준비합니다.

신춘호 농심 회장은 1965년 농심의 전신인 롯데공업을 설립, '롯데라면'을 출시하고 삼양이 독차지하고 있던 국내 라면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신춘호 회장은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자 노선을 걷기로 했습니다. 수중에 있던 당시 돈 500만 원과 명동 사채 시장을 통해 구한 자금으로 힘겹게 라면 사업을 시작합니다. 1965년 신춘호 회장이 설립한 롯데공업이 그 시작입니다. 당시만 해도 신춘호 회장은 '롯데'라는 사명을 사용했습니다. 신격호 회장도 이를 묵인했습니다. 신춘호 회장이 1965년 처음으로 출시한 라면이 '롯데라면'인 이유입니다.

롯데라면은 삼양라면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높은 벽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신춘호 회장의 라면시장 공략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삼양라면을 이기기 위해 '왈순마'와 같은 신제품을 계속 선보였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재고가 쌓이고 저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롯데공업은 도산 위기에 직면합니다. 그때 한 줄기의 빛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바로 정부가 혼분식 장려운동을 펼친 겁니다. 부족한 쌀 대신 밀가루 사용을 장려하면서 라면 시장은 급성장합니다.

이에 힘입어 롯데공업은 1970년 다시 야심 차게 '소고기 라면'을 출시했습니다. 당시 소고기는 특별한 날만 먹는 식재료였습니다. 하지만 소고기 라면을 통해 비싼 소고기를 싼값에,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그동안 닭 육수를 베이스로 했던 라면에서 벗어나 롯데공업의 소고기 라면은 소고기 베이스의 '빨간 국물'을 선보이면서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1975년 당시 스타였던 코미디언 고(故) 구봉서, 고(故) 곽규석을 앞세워 '형님 먼저~아우 먼저~'라는 CF를 통해 신제품 '농심 라면'을 선보이며 소비자들의 관심 끌기에 성공합니다. 이때부터 신춘호 회장의 롯데공업은 삼양식품 따라잡기에 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신춘호 회장은 라면뿐만 아니라 스낵 사업에도 진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번 [결정적 한끗]의 아이템인 '새우깡'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당시 롯데공업은 '롯데'라는 사명을 계속 사용해왔습니다. 따라서 1971년 처음 출시된 새우깡도 '롯데 새우깡'이었던 겁니다. 동생이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라면 사업과 스낵 사업에서 승승장구하자 신격호 회장은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특히 스낵 사업의 경우 당시 롯데제과의 사업과 많은 부분에서 겹쳤습니다. 그러자 신격호 회장은 동생인 신춘호 회장에게 '롯데'라는 사명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롯데공업 시작 때부터 형과의 사이가 틀어졌던 신춘호 회장은 이를 계기로 완벽한 독립을 마음먹습니다. 사명을 고민하던 신춘호 회장은 '농심 라면'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그는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고 롯데와의 단절을 선언합니다. 이후 올해 초 신격호 명예회장이 사망할 때까지도 두 사람의 감정의 골은 메워지지 않았습니다. 새우깡의 시작이 농심 새우깡이 아니라 '롯데 새우깡'이었던 데에는 이런 사연이 숨어있습니다.

#작명의달인 #아리깡에서새우깡으로 #국내최초스낵

'소고기 라면'으로 자신감을 얻은 신춘호 회장은 사업 포트폴리오 확장을 꾀합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새우깡'입니다. 1971년 롯데공업은 국내 최초 스낵인 '새우깡'을 출시합니다. 당시만 해도 간식거리가 충분치 않았습니다. 그랬던 만큼 '새우깡'의 등장은 소비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새우를 활용한 간식은 획기적인 사건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새우깡'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신춘호 회장은 식품 업계에서 '작명의 달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새우깡'도 신춘호 회장이 직접 지은 이름입니다. 신춘호 회장의 어린 딸이 민요 아리랑을 '아리깡~아리깡~'으로 불렀던 것에서 힌트를 얻어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깡밥, 깡보리밥’ 등의 순박한 이미지에 자연스럽게 ‘아리깡, 깡, 뻥’ 등의 이미지가 결합하면서 ‘새우+깡’이라는 단어가 탄생한 겁니다.

이후 농심에서 생산하는 스낵류에는 '~깡'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감자깡', '고구마깡', '양파깡' 등 부르기도 쉽고 소비자들에게 각인되기에도 좋았던 겁니다. 그야말로 절묘한 한 수였습니다. 새우깡에서 시작한 '~깡'이라는 단어는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에게 '깡=스낵'이라는 공식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앞서 신춘호 회장이 작명의 달인이라고 했었는데요. 실제로 신춘호 회장이 작명해 히트를 한 상품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신라면'입니다. 신라면은 국내 라면 시장의 절대 강자죠. 신라면의 '신(辛)'은 신춘호 회장의 성(姓)에서 따온 겁니다. '매울 신'은 신라면의 정체성을 온전히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죠. 그 덕분이었을까요? 신라면은 1986년 출시 이후 꾸준하게 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농심의 대표 제품 중 하나인 '너구리'도 신춘호 회장의 작품입니다. '너구리'의 작명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유명한 우동 중 하나인 '사누끼 우동'에서 왔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사누끼 우동의 특징은 오동통하고 쫄깃한 면발에 있습니다. 너구리 라면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다들 아실 겁니다. 너구리 라면의 면발은 우동에 가깝습니다.

네이밍 전문 업체와 농심의 실무진, 신춘호 회장이 너구리 라면의 작명을 두고 의견을 교환하다가 너구리 라면과 유사한 일본의 사누끼 우동에서 너구리라는 이름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누끼라는 단어로 말장난을 하다 '다누끼'로 불렀는데 '다누끼(たぬき)'는 우리말로 '너구리'입니다. 신춘호 회장이 이 이름을 선택한 것이 '너구리'의 시작입니다.

이 밖에도 면의 모양이 새의 둥지와 같다고 해서 붙여진 '둥지 냉면', 스파게티와 같이 짜장을 비벼 먹는 것에서 착안한 '짜파게티' 등 농심의 히트 상품들에는 신춘호 회장의 작명 센스가 담겨있습니다. 아무튼 어린 딸이 잘못 부른 노래에서 착안한 '새우깡'은 이제 농심의 대표적인 스낵이자, 국민 간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먹으면 더 맛있는 것 아시죠?

#갓파에비센표절논란 #맨땅에헤딩 #농심기술

'새우깡'이 국민 간식으로 각광 받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표절 논란입니다. 실제로 인터넷을 통해 새우깡을 검색해보면 "일본 과자 '갓파에비센(かっぱえびせん)'을 무단으로 베낀 것"이라는 표현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갓파에비센'은 일본 가루비(calbee)사가 1964년 출시한 새우 스낵입니다. 농심 새우깡과 모양도 맛도, 심지어 포장 디자인도 거의 똑같습니다.

농심 새우깡은 갓파에비센보다 7년이나 늦은 1971년 출시됐습니다. 게다가 모양과 맛도 흡사하다 보니 농심 새우깡이 일본 갓파에비센을 베꼈다는 이야기가 신빙성 있게 전파된 듯합니다. 하지만 농심 새우깡은 일본 갓파에비센을 베낀 제품이 아닙니다. 논란의 여지는 있을 수 있지만, 새우깡 제조사인 농심에서는 "사실과 다르다"고 강조합니다.

농심 관계자는 "1971년 초부터 새우깡 개발을 위한 자체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며 "그 과정에서 일본 갓파에비센을 참고한 것은 맞지만 순수 우리 기술로 연구해 내놓은 제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신춘호 회장이 맨땅에 헤딩하더라도 우리 기술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수많은 실패 끝에 만들어 냈다"면서 "농심이 다른 식품 업체들처럼 기술제휴를 맺고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습니다.

일본 가루비(Calbee)社의 '갓파 에비센'.

실제로 당시 롯데공업은 새우깡 개발을 위해 엄청난 양의 밀가루와 새우를 투입했습니다. 새우깡을 개발하기 위해 사용된 밀가루 양은 4.5톤 트럭 80대 분량에 달했습니다. 당시의 경제 상황을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양이죠. 새우깡 시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튀김 온도가 적절치 않아 태우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습니다. 또 가장 먹기에 적당한 강도를 유지하기 위한 강도 실험만 수백 번 시행했습니다. 시제품 생산을 위해 당시 연구원들이 야전 침대에서 숙식하며 제품 개발에 몰두했다는 일화는 아직도 유명합니다.

새우깡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제품입니다. 농심 입장에서는 새우깡이 일본 갓파에비센을 표절한 제품이라는 이야기가 억울할 법도 합니다. 새우깡은 여타 스낵 제품들과 '파칭(Parching)공법'이라는 신기술을 적용해 생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낵류는 기름에 튀깁니다. 하지만 새우깡은 식물성 기름인 팜유를 뿌린 상태로 새우 소금구이처럼 가열된 소금의 열을 이용해 굽습니다. 농심에서는 이런 기술이 새우깡에 자꾸 손이 가게 만드는 비결이라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국민 스낵 새우깡의 탄생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와 표절 논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이후 이어질 [결정적 한끗]에서는 새우깡이 중독성 있는 맛을 갖게 된 비결과 마케팅 비법 등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풀어낼 예정입니다. 이어질 다른 내용들도 놓치지 말고 꼭 읽어보세요. 무척 재미있을 겁니다.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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