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食스토리]는 평소 우리가 먹고 마시는 다양한 음식들과 제품, 약(藥) 등의 뒷이야기들을 들려드리는 코너입니다. 음식과 제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부터 모르고 지나쳤던 먹는 것과 관련된 모든 스토리들을 풀어냅니다. 읽다보면 어느 새 음식과 식품 스토리텔러가 돼있으실 겁니다. 재미있게 봐주세요. [편집자]
대학 마지막 학기쯤 수업을 마치고 집에서 뒹굴대던 저는 유튜브에서 영상 하나를 봤습니다. 식탁 위에 떨어져 있던 '불닭볶음면' 면발을 슬쩍 집어먹은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영상이었는데요. 저는 '도대체 얼마나 맵길래?'라는 호기심에 곧바로 편의점에 달려가 불닭볶음면을 사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영상 속 강아지와 똑같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입이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에 물 한 병을 순식간에 들이켰고, 수건은 땀으로 흠뻑 젖어버렸습니다.
그날 이후 불닭볶음면은 제게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습니다. 더욱 힘든 건 졸업 이후였습니다. '마라'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회식 테이블에도 마라탕이 출몰했습니다. 그런 날이면 땀으로 목욕을 하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매운맛은 왜 땀이 나게 만들까요. 땀을 안 흘리고 매운 음식을 먹는 법은 없을까요. 그리고 이 땀이 건강을 해치지는 않을까요.
불닭볶음면의 제조사인 삼양식품과 신라면을 만드는 농심에 물어봤습니다. 답변은 "매운맛은 '맛'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의 혀는 단맛·짠맛·지방맛·신맛·쓴맛·감칠맛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운맛은 '통증'에 가깝습니다. 입안에 있는 ‘TRPV1’이라는 수용체에 캡사이시노이드(캡사이신)이 달라붙으며 주는 자극의 일종입니다. '매운맛'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매운 음식에 들어간 다른 재료의 맛이 착각을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TRPV1은 원래 체온과 관련된 수용체입니다. 체온이 43도 이상으로 오를 시 활성화돼 "몸이 과열됐다"는 신호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 수용체는 음식의 일부 물질도 '위험하다'고 인식합니다. 캡사이신이 여기에 속합니다. TRPV1는 매운맛을 맛이 아니라 '체온을 올리는 무언가'로 느낀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연스럽게 TRPV1의 체온 조절 기능이 작동하게 되고 땀이 나는 겁니다.
뚱뚱한 사람이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더 많은 땀을 흘리는 이유도 같은 원리입니다. 뚱뚱한 사람은 일단 표면적이 넓습니다. 피하지방층은 보통 사람보다 더 두껍습니다. 때문에 열을 더 쉽게 받게 되고, 받은 열을 밖으로 발산시키는 기능은 떨어집니다. 자연스럽게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더 많은 땀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피부 스스로 온도를 낮추지 못하니, 밖에 물을 끼얹어 강제로 식히는 겁니다.
이런 현상은 개인별로 차이가 다소 있을 뿐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결국 매운맛을 먹으면서 땀을 흘리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중화는 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매운맛은 '비휘발성 매운맛'입니다.
비휘발성 매운맛은 고추·생강·후추 속 캡사이신이 만드는 자극입니다. 보통 10분 이상 입에 남아있죠. 이 비휘발성 매운맛은 우유 단백질 '카제인'과 계란 노른자 속 지질 '레시틴'과 반응합니다. 매운 음식을 먹은 후 우유나 계란 노른자를 먹는다면 매운맛을 녹여버릴 수 있습니다.
매운맛과 건강의 관계도 한 번 알아볼까요. 일단 매운맛을 즐긴다고 위장이 나빠진다는 이야기는 '편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아주 매운'음식을 '너무 자주'먹을 경우에는 염증이 생길 수 있습니다. 캡사이신이 위장벽을 자극하는 성분이어서입니다.
또 널리 알려진 '매운맛 다이어트'는 근거 없는 이야기입니다. 캡사이신은 자율신경을 자극해 에너지 소비량을 높입니다. 다만 매운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것은 결국 소금과 설탕이죠. 살이 빠질 수가 없습니다.
매운맛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잘못된 겁니다. 앞서 설명드렸듯 매운맛은 통증에 가깝습니다. 인체는 고통을 느끼면 엔도르핀·아드레날린을 분비합니다. 엔도르핀은 통증을 줄이며 쾌감을 줍니다. 아드레날린은 개운하게 만듭니다. 강한 매운맛을 먹을 때 일시적으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을 받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혀의 고통과 소화불량이 뒤따릅니다. 스트레스에는 오히려 달콤한 음식이 더 효과적입니다.
피부 관리에 매운맛이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반 정도만 맞습니다. 땀에는 인체의 노폐물이 담겨 있습니다. 매운 음식을 먹어 땀을 흘려준다면 노폐물 배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혈관이 확장하면서 혈액순환이 좋아지죠. 다만 매운 음식은 혈관을 한쪽으로 몰리게 해 홍조를 일으킵니다. 체온이 오르면 몸 속의 수분도 부족해집니다. 이는 피부 트러블 발생의 가장 큰 원인입니다.
김연진 닥터쁘띠의원 강남점 대표원장은 "매운 음식은 자극이 강해 땀을 흘리게 만들고, 일시적이나마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다"며 "하지만 피부 혈관을 확장시키기 때문에 안면홍조를 악화시킬 수 있고 염증성 물질을 증가시켜 모낭염이나 여드름 등을 악화시킬 수 있어 너무 많이 먹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매운맛은 긍정적인 효과와 부작용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매운맛은 한국인의 '소울'이나 다름없는 맛입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거나 과음하게 되면 으레 얼큰한 국물을 찾게 되니까요. 곧 연말입니다. '위드 코로나'도 시작됐습니다. 아마 더 자주 매운 음식을 만나게 되겠죠. 독자 여러분 모두 '슬기로운' 매운 음식 섭취로 즐거움과 건강 모두를 지키실 수 있길 바랍니다. 지나침만 경계한다면 별 탈 없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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