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김아름 기자] 국내 식품 기업들이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지목하고 있는 'K소스' 시장에서 고추장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현지의 칠리 소스와 결이 비슷하면서도 차별화된 풍미가 있어 외국 소비자들에게도 접근 장벽이 낮다는 평가다. 특히 'Korean chilli sauce'가 아닌 'Gochujang'으로 표기하는 등 'K트렌드'를 적극 반영하고 있다.
커지는 소스 시장
26일(현지시간)부터 오는 30일까지 태국 방콕 임팩트 아레나에서 열리는 '타이펙스 아누가 2026'의 주요 트렌드 중 하나는 '소스'였다. 전세계의 주요 기업들이 다양한 소스를 메인 부스에 전시하고 있었다. 요리의 베이스가 되는 소스부터 메인 메뉴에 곁들이는 디핑 소스, 완성된 요리에 풍미를 더해 주는 제품까지 다양한 카테고리의 소스가 관람객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런 트렌드는 우연이 아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그랜드 뷰 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소스·조미료 시장 규모는 지난해 1830억달러(약 274조원)에서 2030년 2375억달러(약 356조원)로 30% 성장할 전망이다. 국내 역시 마찬가지다. 식품의약안전처에 따르면 국내 소스 시장 규모는 2019년 1조3700억원에서 2024년 약 3조원으로 두 배 이상 성장했다.
외식업계에서도 소스의 중요성은 커져가고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후라이드 치킨을 주문하면 양념 소스나 머스터드 소스 중 한 가지를 제공하는 수준이었다면 최근엔 4~5가지 소스를 제공하며 취향대로 찍어 먹을 수 있게 하는 브랜드가 늘고 있다. 소스 선택이 '취향'의 영역으로 올라서며 시장이 성장했다는 분석이다.
기본 재료를 가지고 자신만의 요리를 만드는 '모디슈머' 문화 역시 시장 성장을 채찍질했다. 기존 메뉴에 색다른 소스 하나만 더해도 맛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비자들은 기업들이 시도하지 못하던 파격적인 조합으로 새 메뉴를 만들어 냈다. 실제로 농심이 최근 출시한 신라면 툼바, 신라면 로제는 모두 모디슈머들이 기존 신라면에 다양한 소스를 조합해 만들어 낸 메뉴를 제품화했다.
CHILLI 아니고 GOCHUJANG
타이펙스 아누가에서도 대상 등 국내 기업들은 물론 해외의 수많은 기업들도 수십가지 이상의 소스 신제품을 들고 나왔다. 그 중에도 인상깊었던 건 'GOCHUJANG' 소스였다. 그간 고추장을 기반으로 한 소스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 'CHILLI' 혹은 'KOREAN CHILLI' 정도로 표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SOY SAUCE'로 통칭되는 간장, 다른 나라의 소스와 비교하기 어려운 된장과 달리 고추로 만드는 소스는 대부분의 국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타이펙스 아누가에 참가한 많은 기업들이 'CHILLI SAUCE'와 'GOCHUJANG SAUCE'를 구분해 소개하고 있었다. 아예 한글로 '고추장'을 타이핑한 제품도 있었다. 단순히 이색적인 해외의 칠리 소스로 소개하는 게 아닌, '한국의 고추로 만든 소스'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우리나라에서도 '하이몬 월남쌈 소스' 등으로 인지도가 있는 '수리 인터푸드(SUREE Interfood)'는 타이펙스 아누가에서 자사의 스리라차 소스 브랜드 '크라잉 타이거(Crying Thaiger)'의 새로운 플레이버를 메인 제품으로 홍보했다. 총 7가지 신규 플레이버 중 2가지가 '코리안 스타일 스리라차'와 '고추장 스리라차' 등 고추장 베이스 제품이었다.
이날 맛본 고추장 스리라차는 고추장의 매운 감칠맛에 스리라차의 상큼한 매운맛이 더해져 색다른 풍미가 났다. 기존 한국의 전통 고추장은 점성이 높고 텁텁한 맛이 있어 '요리용 소스'의 포지션이었다면 크라잉타이거의 고추장 스리라차는 튀김이나 구이 요리에 바로 찍어먹을 수 있는 디핑소스에 가까웠다.
말레이시아의 소스 전문 기업 '유엔천(Yuen Chun)'도 다양한 한국식 소스 시리즈의 하나로 'GOCHUJANG'을 선보였다. 이 제품 역시 기존의 한국식 고추장보다 점성을 낮춰 '떠서 쓰는 고추장'이 아닌 '부어 쓰는 고추장'을 구현한 게 특징이다. 이밖에도 다양한 중국·동남아 기업들이 자사의 고추장 소스를 소개했다.
해외 기업들이 고추장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자국인들이 익숙한 칠리 소스의 결을 갖고 있으면서도 새콤달콤한 '칠리소스'와 다른 진하고 깊은 발효 풍미가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익숙해 평범하지도, 지나치게 낯설어 두렵지도 않은 적절한 포지션에 '고추장'이 있다는 설명이다.
수리 인터푸드 관계자는 "다양한 칠리 페이스트 풍미의 스리라차 소스를 개발하다가 고추장을 접목하게 됐다"며 "스리라차의 풍미를 유지하면서도 고추장만의 독특한 맛이 살아 있어 K푸드에 관심이 많은 젊은 소비자들에게 인기를 끌 것 같다"고 말했다.
'K고추장'의 자존심 지킨다
K소스를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낙점한 국내 대표 식품 기업들 역시 고추장을 전면에 내세워 동남아시아 시장 공략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게 대상이다. 대상그룹은 김치와 김, 간편식과 함께 소스를 4대 글로벌 전략 카테고리로 정하고 해외 시장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과거엔 수출 장류 대부분이 현지 교민을 중심으로 소비됐지만 최근 K푸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현지인 소비 비중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상도 현지인의 입맛과 식문화를 반영해 맵기와 제형, 용도를 현지화해 오리지널 고추장·미소 고추장·떡볶이 고추장·비빔밥 고추장 등의 제품을 내놓고 있다. 또 샐러드나 타코, 스프링롤 등에 드레싱·디핑 소스 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제품도 내놨다. 특히 마마수카를 통해 내놓은 고추장 페이스트는 2026 타이펙스 아누가에서 'New to Market Street' 혁신 제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삼양식품도 타이펙스 아누가에서 글로벌향 라면 브랜드 'MEP'의 신제품 '고추장 팟차'를 선보였다. 태국의 해산물 볶음 요리인 '팟 차(PAD CHA)'에 고추장을 더한 'K타입 퓨전 볶음면'을 시도했다는 설명이다.
농심 역시 글로벌 출시를 준비하고 있는 신제품 '신라면 로제'의 킥으로 고추장을 활용했다. 크림과 토마토 소스가 베이스인 기존 로제 소스에 고추장을 섞어 한층 더 한국적인 맛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이번 타이펙스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더본코리아, 교촌에프앤비 등 주요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들도 고추장 베이스의 소스를 선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국 장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는 외국 기업들이 '고추장'이라는 이름을 활용하면서 해외 소비자들에게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업계에선 이를 '작은 부작용'으로 본다. 국내에서 '파인애플 피자'나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분노하는 이탈리아인 밈이 생긴 건 그만큼 이탈리안 푸드가 국내에서 일상적인 음식으로 자리잡았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고추장 역시 일부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이 나올 수 있지만 전체 시장으로 보면 인지도 확대라는 장점이 더 크다는 분석이다. 오히려 국내 기업이 현지 기업들의 '퓨전 고추장'을 보고 현지화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많다. 로컬 푸드가 글로벌 푸드로 진화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필연적인 흐름이라는 설명이다.
권현태 대상 브랜드커뮤니케이션 담당은 "고추장의 경우 걸쭉한 제형이 현지의 테이블 소스 문화와 맞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 농도를 묽게 조절하고 장 특유의 발효향을 줄인 깔끔한 맛의 제품을 개발했다"며 "향후 고추장케첩, 고추장마요, 김치케첩, 김치마요 등의 퓨전 장류 제품도 글로벌 시장에 순차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