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위해 퇴사하게 됐는데 회사에서 IRP를 가입하라고 합니다. IRP가 뭔가요?"
지난달 31일 이직을 위해 6년간 몸담았던 회사를 퇴사한 홍민상씨(가명·31세)가 기자에게 한 질문이다.
퇴직연금 적립액이 지난해말까지 190조원을 넘어설 정도로 성장했지만 퇴직연금에 대해 잘알지 못한다는 가입자들이 많다.
지난해 금융투자협회가 DB(확정급여형)퇴직연금을 채택하고 있는 기업 담당자들을 설문조사해 '퇴직연금 담당자가 퇴직연금 운용 관련 업무를 상시로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고 퇴직연금 관련 업무는 부수업무로 인식하고 있다'는 결과를 내놨다.
아울러 근로자 역시 본인의 퇴직연금이 어떻게 운용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퇴직연금이 회사와 혜택을 누려야 할 근로자의 무관심 속에 양적인 성장만 지속해온 셈이다.
◇ 퇴직연금은?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노후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2005년 12월 도입된 연금제도다. 회사가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할 퇴직급여를 금융회사에 위탁해 운용, 퇴직 시 일시금 또는 연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의 준 법정제도다.
퇴직연금은 퇴직금이 금융회사에 위탁돼 있기 때문에 회사가 도산하더라도 안정적으로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다만 국민의 최저 생계를 보장하기 위해 강제로 가입하는 국민연금과 달리 퇴직연금은 강제성이 없다. 따라서 회사는 노사 합의를 통해 기존의 퇴직금 제도를 설정할지,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할지 결정할 수 있다.
회사가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했다면 확정급여형(DB·Defined Benefit), 확정기여형(DC·Defined Contribution) 중 하나를 선택해 퇴직금을 적립하게 된다.
먼저 DB형은 회사가 근로자의 퇴직금 중 일부를 금융회사에 적립해 운용하도록 하고 근로자 퇴직 시에는 정해진 금액을 지급하도록 하는 제도다.
근로자는 퇴직 시 퇴직 진전 3개월 평균급여에 근속연수를 곱한 금액을 지급받기 때문에 받는 금액은 종전의 퇴직금과 동일하다.
반면 회사 측은 자금 운용 결과에 따른 손익이 귀속된다. 따라서 DB형에 가입한 회사의 경우 자금운용 결과에 따라 이익이 발생할 수도, 손실이 생길 수도 있다.
DC형은 회사가 근로자의 연간 임금총액의 일정 비율을 금융회사에 적립하면 근로자가 적립금을 직접 운용하는 방식이다. 운용방식은 회사와 금융회사가 체결한 계약에 따라 제시되는 운용상품중 중 근로자가 자유롭게 선택이 가능하다.
DC형은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기 때문에 운용에 따른 손익은 근로자에게 귀속된다.
DB형과 DC형 외에는 개인형 개인퇴직계좌(IRP·Individual Retirement Pension)가 있다.
개인형 IRP는 근로자가 이직하거나 퇴직할 경우 퇴직연금 유지를 위해 마련된 장치다. 그간 직장인만 가입할 수 있던 것이 2017년 7월 이후부터는 공무원, 자영업자 등으로 범위가 확대됐다.
개인형 IRP는 근로자가 이직이나 퇴직시점이 돼 퇴직금을 받을 경우 개인이 직접 계좌를 개설해 운용하게 된다.
퇴직금에 더해 연간 1800만원까지 추가납입이 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가입자가 직접 납입한 금액은 연금저축 납입액과 합산해 연간 700만원까지 세액공제가 가능하다.
이후 퇴직연금 수령 개시 연령이 되면 일시금으로 받을지, 연금으로 받을지 선택할 수 있다.
기업형 IRP는 10인 미만의 사업장의 경우 근로자 전원의 동의를 얻어 개인 퇴직계좌를 설정하는 특례로 DC형 퇴직연금과 유사하다.
◇ 퇴직연금, 왜 관심이 없을까
퇴직연금은 DB형과 DC형이 전체 적립액의 90%를 차지한다. 문제는 DB형과 DC형이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많은 금액이 적립된 DB형은 121조2000억원, 전체의 63.8%다.
DB형은 근로자에게 돌아가는 금액이 종전의 퇴직금과 같다 보니 자연스럽게 근로자의 관심이 떨어진다.
회사에서는 손실이 날 경우 이를 떠안아야 하기 때문에 리스크가 큰 상품보다는 안정적인 상품에 투자하는 편이다. 실제 지난해말 기준 DB형에 적립된 퇴직연금 중 95.2%, 115조4000억원(대기성자금 포함)가 원리금보장형에 편중됐다.
여기에 회사 내부에서 담당자가 퇴직연금을 중점적으로 관리하기 힘든 업무환경도 DB형을 보수적으로 운영하는 이유로 꼽힌다. 지난해 7월 금융투자협회 조사에 따르면 퇴직연금 담당자의 퇴직연금 업무 비중은 약 10%가량에 불과했다.
근로자가 직접 관리하는 DC형은 49조7000억원이 적립됐다. 전체의 26.1% 수준이다.
DC형은 근로자가 직접 운용함에도 관심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지난해 금융투자협회 조사에 따르면 본인의 퇴직연금에서 몇개의 상품에 투자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는 비중이 27%에 달했다. 알고 있더라도 1년 중 상품을 변경하지 않은 비중이 83%에 달했다.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은행 퇴직연금 부서 관계자는 "사실 근로자가 퇴직연금이 DC형에 적립돼 있는지도 잘모르고 알더라도 이를 직접 운용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며 "DC형 퇴직연금을 보다 쉽게 운용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를 마련해 편의성을 제고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DB형과 DC형의 수익률은 높지 않은 수준이다.
지난해말 기준 DB형의 연간 평균수익률은 1.46%였고 DC형(기업형 IRP 포함)은 0.44%였다. 지난해말 기준 은행의 평균 예금금리(1.99%) 보다 낮은 수준이다. 퇴직연금 시장이 겉(적립금액)만 커지고 속(수익률)은 텅빈 '공갈빵' 신세라는 지적이다.
개인형 IRP의 경우 2017년 7월 가입대상 확대 이후 적립금이 지속적으로 늘어 지난해말까지 19조2000억원이 적립됐다. 다만 수수료가 고객이 가입을 꺼리는 이유로 꼽힌다.
DB형과 DC형의 경우 대체로 회사가 수수료를 부담한다. 하지만 IRP의 경우 근로자가 운용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 2017년 7월 IRP 가입 대상자가 확대됐을 당시 여러 금융사가 IRP 수수료 인하를 내걸고 마케팅을 한 것이 이러한 이유에서다.
은행 관계자는 "IRP는 비과세 혜택이 있지만 '없던 수수료'가 생긴다는 인식이 있다"며 "게다가 젊은층은 IRP 계좌로 퇴직금을 받더라도 일시금으로 인출하려는 경향이 크다. 운용하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