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달간 한국은행의 통화정책은 널뛰기를 했다. 지난달 27일 기준금리 인하 예상을 깨고 동결을 선택했던 한은은 불과 보름여만에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인하했고, 그로부터 열흘 뒤 한국판 양적완화로 불리는 환매조건부채권 무제한 매입 조치를 내놨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은이 31일 공개한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을 보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31번째 확진자가 발생한 지난달 18일 이후 대구·경북지역 신천지 신도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급속한 확산세를 보일 때조차 한은의 상황인식은 안일했다. 과거 사스와 메르스 사태 등을 예로 들며 경제충격이 일시적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2월 금통위가 열릴 때까지 그랬다.
당시 의사록에는 "자연재해나 전염병 등 경기 외적인 요인으로 인한 경제충격은 대개 영구적 생산손실로 이어지기보다는 단기적 변동성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한 금통위원의 발언이 나온다.
다른 금통위원도 "과거의 사례 등에 비추어 최악의 상황은 올해 1분기에 한정될 가능성이 크다"면서 금리동결을 주장했다. 이런 식으로 금통위원 6명 중 4명이 금리동결에 힘을 실었다. 이미 힘의 균형추가 동결로 기울었기에 이주열 총재는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필요가 없었다.
금통위원들이 이 같은 판단을 한 배경에는 한은 조사국의 보고서가 결정적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사국 내 거시재정팀과 국제종합팀은 '주요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 영향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사스, 메르스, 에볼라 등 전염병과 허리케인 카트리나, 동일본 대지진, 남아시아 지진해일 등 자연재해가 일어났을 때 경제에 미친 영향 등을 분석한 보고서다.
결론은 이랬다. ▲전염병의 경우 확산세가 진정되면 빠른 속도로 회복되는 경우가 많았고 ▲앞으로도 상시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리스크인 만큼 인프라구축, 전문인력 양성 등 체계적인 재난대응시스템 등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난대응시스템 구축은 한은의 역할과 거리가 먼 내용이다. 결국 금통위원들이 주목한 건 '빠른 속도의 회복'이었고, 이 논리가 그대로 금통위들의 발언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같은 인식은 보름여만에 180도 뒤집혔다. 한은은 이달 16일 임시 금통위를 열어 기준금리를 0.50%포인트 인하했다. 임시 금통위를 열어 금리를 낮춘 건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8년 10월 이후 처음이다.
한은이 금리인하를 주저하는 사이 미국 연준은 두차례에 걸쳐 기준금리를 1.50%포인트 낮췄다. 영국은 기준금리 0.50%포인트 인하와 300억파운드 규모의 부양책을 내놨고, 유럽중앙은행도 연말까지 1200억유로의 양적완화정책을 확대한다고 결정했다.
한국보다 확진자수가 적은 미국과 유럽이 발빠른 조치에 나선 게 금통위원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3월 금통위 의사록에는 "(우리나라도) 취약부분에 대한 유동성 지원 확충을 넘어 과감한 통화정책 대응이 필요하다"는 금통위원의 발언이 나온다. 2월 금통위에서 금리 인하 카드는 접어둔 채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를 5조원 늘린 것에 대한 자책성 발언으로 풀이된다.
경제충격이 일시적일 것이라는 낙관론도 쏙 들어갔다. 한 금통위원은 "현재 상황은 미시적·부문별 충격만이 아닌 거시적·총수요 충격으로 확대되는 상황"이라는 진단을 내놨고, 다른 금통위원은 "경제활동 위축이 생산자본과 노동력의 영구적 손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유일하게 기준금리 0.50%포인트 인하가 아닌 0.25%포인트 인하를 주장한 임지원 금통위원도 "수요 위축이 당초 예상보다 장기화될 가능성이 있다"며 기존의 전망에서 한걸음 물러섰다.
보름여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는 비난을 의식한 것일까. 한은은 금리인하에 이어 지난 26일 무제한 돈풀기 카드를 꺼냈다. 1950년 한국은행 설립 이래 처음있는 조치다.
하지만 채권을 단순매입해 유동성을 영구적으로 공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3개월 뒤 금융기관이 되사가는 조건을 붙여 선진국에서 동원한 양적완화와 차이가 있다. 한은이 여전히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한은 내부에서도 과감한 대응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차현진 한은 인재개발원 교수는 미디어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올린 칼럼에서 "위기 상황에서도 과거에 형성된 조직문화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몸을 사린다면 그것은 독립성을 갖춘 한국은행의 태업이자 직무유기"라고 꼬집었다. 상투적인 방식으로는 전투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