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에서 쏜 불발탄 하나가 국내 자금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국가나 마찬가지인 지방정부가 빚 보증을 거절한 것이 방아쇠가 됐다.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금리 인상이 이어져 위기감이 커지던 채권시장은 전에 보기 드물 정도로 얼어붙었고, 부동산 개발 자금줄인 프로젝트파이낸싱(PF)도 뚝 끊겼다. 레고랜드에서 촉발된 이번 자금시장 대란의 배경과 원인을 되짚고, 여전히 불씨가 꺼지지 않은 시장 현황을 바탕으로 정부의 대응을 점검한다. [편집자]
"레고랜드는 외국기업이 모든 수익을 가져가는 불공평한 계약구조임에도 그동안 강원도는 늘 끌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가 안고 있는 2050억원의 보증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번 회생 신청의 목적이다."(2022년 9월28일)
"그렇지 않아도 어려운 자금 시장에 본의 아니게 불필요한 혼란과 오해가 초래돼 매우 유감스럽다."(2022년 10월24일)
김진태 강원도시자의 두 발언 사이에 있던 한 달여, 국내 자금시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김 지사 말처럼 그렇지 않아도 금리·환율·물가의 '삼고(三高)' 속에 불확실성이 커진 금융시장이었다.
그 와중에 '신용의 기본'을 국가나 다름 없는 지방정부, 강원도가 흔든 일이 터진 것이다.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강원도, 빚 못 갚은 지방공사 '회생' 던진 이유
불씨는 겨우 테마파크 하나에 숨어 있었다. 강원도 춘천시 하중도에 지어져 지난 5월5일 개장한 '레고랜드 코리아 리조트'가 문제였다. 이 사업은 처음 계획부터 개장까지 11년이나 걸렸다.
사업성 문제에 시행사가 자금난을 겪었고, 와중에 문화재까지 출토되며 개발이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도 많았다. 기공식만 3차례 할 정도였다. ▷관련기사: [르포]레고랜드에는 '어린이'만 있었다(5월10일)
이번 금융대란의 중심에 있는 강원중도개발공사(GJC)는 강원도가 레고랜드 개발을 위해 2012년 8월 설립한 공사다. 강원도 도유지 자산에 기반해 레고랜드와 주변 기반조성사업을 맡고 있다.
리조트 매출에 따라 레고랜드 코리아로부터 정해진 임대료를 받는 게 수입이다. GJC 지분은 강원도가 44.02%를, 레고랜드 운영사인 멀린엔터테인먼츠그룹홀딩스가 22.54%를 쥐고 있다.
레고랜드 준공이 다가오던 2021년 11월, GJC는 사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특수목적법인(SPC) 아이원제일차를 통해 2050억원 규모의 자산담보기업어음(ABCP)를 발행했다. 발행 당시 신용등급은 최고인 'A1'였다. 아이원제일차가 투자금을 못 갚아도 강원도가 대신 갚아주는 지급보증이 있어서다.
그러나 지난달 29일로 만기가 되는 이 ABCP에 대해 강원도가 돌연 지급보증을 거부했다. 만기 하루 전인 28일 김진태 강원도지사가 "GJC를 회생신청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것이다. 대출이 연장되더라도 GJC가 스스로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법원의 회생절차를 통해 종전 부지 매각 계약을 무효화한 뒤 재매각하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전 지사 시절 벌어진 부실사업이 도정에 부담을 주지 않도록 정비하겠다는 것이었다. 레고랜드 매출에 연동된 현재 수익구조로는 지방공사인 GJC의 빚을 갚을 수 없다는 판단에 '지방공사의 회생 신청'이라는 이례적인 수를 던진 것이다.
이런 판단 배경에는 정치가 있다. 김 지사는 지난 6·1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소속으로 당선됐다. 반면 레고랜드 사업이 추진된 2010년 이후 강원도정은 줄곧 더불어민주당 계열 지사(이광재·최문순)가 잡고 있었다.
'지방정부가 보증한 어음' 부도의 의미
결국 만기를 넘긴 아이원일차의 ABCP는 지난달 30일 1차 부도를 맞았다. 신용등급은 'C(채무 불이행 위험 매우 높음)'로 뚝 떨어졌다. 연휴를 지낸 닷새 뒤인 지난 4일에는 최종 부도처리 됐다. 등급은 최하인 'D(상환 불능)'까지 추락했다. 채권시장 초유의 일이었다.
신용평가 기관들도 당황한 이벤트였다. 한국신용평가는 1차 부도 때 "대한민국의 정부조직 구성 체계 및 관련 법령에 근거할 때 지방자치단체의 신용도를 국가신용등급에 준하는 것으로 판단해 왔다"며 "이번 ABCP 미상환이라는 일련의 사태는 이러한 판단근거를 훼손시킬 수도 있는 중대한 사안으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방정부가 담보한 채권도 떼일 수 있는 상황이 닥치자 금융시장은 순식간에 경색됐다. ABCP와 기업어음(CP), 회사채 등 자금조달 창구는 얼어붙었다.
이후 과천시, 천안시가 비슷한 구조로 발행한 자산담보부단기채(ABSTB)가 투자 유치에 난항을 겪었다. 초우량 공채로 평가받는 한국전력과 한국도로공사의 채권 발행도 흥행에 실패하면서 혼란은 가중됐다.
특히 건설사업 자금을 확보하는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이 직격탄을 맞았다. 금융시장에서는 건설사와 증권사가 줄도산 할 수 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결국 시장을 안정시키려 정부가 직접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지난 23일 50조원 넘는 규모의 지원책을 낸 것이다. ▷관련기사: '레고랜드발 급성 돈맥경화' 막으려…정부 50조원 공급 프로그램(10월23일)
"회생일뿐 디폴트 아니다"?
하지만 아직 금융시장 안정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가다. 여전히 신용도가 낮은 기업의 자금 직접 조달은 어려운 상황이다. 회사채 발행이 어려운 기업들은 은행으로 몰리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강원도 때문에 2050억원으로 막을 수 있던 일에 50조원으로도 해결하지 못할 형국"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금융시장의 혼란이 가중되던 중인 지난 21일, 강원도는 내년 1월 GJC 보증채무를 갚겠다고 했다. 김 지사는 정부의 '50조원+α' 지원 프로그램 발표 뒤인 24일에는 "강원도는 처음부터 보증 채무를 확실히 이행하겠다고 했다"며 ABCP 디폴트 자체가 '시장의 오해'라고 항변했다.
그는 "회생 신청과 디폴트는 전혀 별개"라며 "회생법 250조에 의하면 '회생은 보증 채권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로 나와 있다. 회생 신청은 계속 진행이 된다"며 "구체적인 변제 일정을 제시했고, 중앙정부도 고강도 대책을 발표했으니 금융시장이 속히 안정을 찾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 지사가 금융시장을 패닉에 빠트렸다는 것은 여당과 한몸인 정부도 부인하지 못하는 부분이다.
지난 24일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레고랜드 사태가 이번 시장 불안에 영향이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며 "다만 강원도에서도 이런 파장을 알고 (GJC회생 신청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