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중위권 생명보험사 흥국생명이 외화 신종자본증권(영구채)의 조기상환에 실패하면서 후폭풍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강원도 레고랜드 사태로 국내 채권시장의 충격이 상당했는데, 이번엔 한국 기업이 발행하는 외화표시채권(한국물·KP)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신뢰가 훼손될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겁니다.
앞으로 보험사들의 해외 자금 조달이 꽤 어려워질 것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심하게는 '흥국생명이 망하는 것 아니냐'는 금융소비자들의 우려도 있는데요. 대체 무슨 상황이고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신종자본증권의 성격
시계를 거꾸로 돌려봅시다. 금융기관들은 기본적인 달러 수요가 있기 때문에 해외에서 달러 기준 채권을 발행해 달러를 조달합니다. 흥국생명은 지난 2017년 11월 9일 싱가폴 거래소를 통해 5억달러(당시 한화 5570억원 수준) 규모의 외화 표시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했습니다. 만기는 30년, 금리는 연 4.475%였죠.
신종자본증권은 대규모 자금을 끌어 모으기 위해 발행하는 빚문서인 채권의 한 종류인데요. 투자자들에게 돈을 반드시 돌려줘야하는 만기가 30년 이상으로 길거나 아예 없기 때문에(영구적) 영구채라고도 불립니다.
채권이지만 상환의무가 없거나 매우 적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 회계적으론 자본으로 인정받습니다. 이런 이유로 보험사들은 재무건전성을 측정하는 지표인 지급여력비율(RBC) 관리를 위해 신종자본증권을 발행하곤 했죠.
만기가 길거나 아예 없고, 상환의무까지 미비하다면 투자자들의 돈을 모으기가 쉽지 않죠. 그래서 발행사들은 통상 발행 후 5년 혹은 10년에 한번씩 투자자들로부터 채권을 다시 사들인다는 조건(콜옵션·조기상환)을 붙여서 팝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만기를 5년 또는 10년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죠. 조기상환이 법적의무는 아니지만 투자자와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차원에서 기업에서도 조기상환을 이행하는 걸 관례로 여겼습니다.
콜옵션 실패, 그 후
흥국생명의 경우 2017년 발행한 신종자본증권의 발행 5년이 되는 시점인 오는 9일에 투자자들로부터 채권을 다시 사들여 빌린 원금과 이자를 상환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1일 갑자기 "조기상환 실현이 불가능해졌다"고 선언해 버린 겁니다.
2009년 우리은행의 달러화 후순위채 조기상환 미행사를 제외하면 한국물 시장에서 이번과 같은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시말해 2009년 이후 13년 동안 국내 금융기관들은 모두 조기상환권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거죠. 이번 일이 언론에 대서특필된 이유입니다. 그만큼 예외적이고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흥국생명이 조기상환을 처음부터 포기했던 건 아닙니다. 콜옵션에 필요한 5억달러 수준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외화 신종자본증권 3억달러(한화 4100억원 수준)를 발행하고, 후순위채 1000억원을 더해 자금을 마련하기로 했는데 모두 잠정연기했습니다.
미국의 고강도 긴축 기조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3연임 결정 등으로 한국물을 비롯한 신흥국 회사채에 대한 투자심리가 크게 악화된 게 주된 배경으로 꼽힙니다.
NH투자증권에 따르면 올해 한국물의 발행액은 281억달러, 만기 도래액은 204억달러를 기록했습니다. 만기 도래액 대비 발행액이 77억달러 더 많은데 그쳤죠. 지난해에는 만기 도래액(171억달러) 대비 발행액(361억달러)이 190억달러 더 많았다고 해요. 채권을 찍어내도 투자자들이 사주지 않으니 발행 자체가 안되고 있다는 뜻이랍니다. 이 증권사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보다 하반기 수급이 더 타이트해져가고 있다"고도 했죠.
흥국생명은 조기상환을 하지 않는데 대한 '패널티(불이익)'로 투자자들에게 기존 주기로 한 이자(4.48%)보다 더 높은 이자를 물어주기로 했습니다. 이걸 스텝업이라고 합니다. 5년이 지나면 돈을 회수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투자한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입힌 데다, 다음 콜행사 주기에 실제 상환될 수 있을 지 불안할 수 있으니 이자를 더 얹어주겠다는 약속이죠.
기존 약속한 콜옵션 미행사 시 변경금리가 미국채 5년물 금리(10월말 기준 4.27%)에 2.472%를 더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6개월 후로 정해진 다음 콜옵션 행사 주기에 흥국생명 투자자들이 받을 수 있는 이자율은 6.7%대로 늘어났습니다. 이게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의 전말입니다.
흥국생명 '일장일단'
흥국생명으로선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자비용을 아꼈습니다. 무슨말이냐구요? 다음 콜옵션 행사주기에 6.7%대 이자를 주기로 해 금리 부담이 기존보다 분명 높아졌죠. 하지만 현 상황에서 무리하게 채권 발행을 강행하는 것보다 차라리 6.7%대 이자를 주는 게 더 싸게 먹힌다는 겁니다.
예시입니다만 지금은 연 7~8%대 이자를 줘도 사겠다고 나서는 투자자를 구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일부에서는 연 10%가 넘는 고금리를 줘야 팔릴 수 있을 것이란 말도 나옵니다. 시장이 그만큼 얼어붙었다는 거예요.
시장의 신뢰를 일부 잃어버린 건 뼈아픕니다. 콜옵션 포기 소식이 퍼지자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가격이 30%이상 급락했다고 합니다. 흥국생명이 이전 발행한 후순위 채무 중 약 1600억원이 내년중 만기가 돌아올 예정이라는 점도 우려를 키웁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이번 콜옵션 미행사로 향후 흥국생명의 자본시장 접근성이 낮아질 경우, 추가 자본성 증권 조달에 어려움을 겪거나 금리 부담이 과중해지는 등 자본관리능력이 저하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렇다고 흥국생명의 자금사정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지난 3월말 기준 흥국생명의 유동성비율은 89.8%로 집계됐습니다. 유동성비율은 기업의 단기 지급 능력에 해당하는 현금 동원력을 가늠하는 지표입니다. 높을수록 양호한데요.
3월말 생명보험업계 평균이 206.5%라는 점을 고려하면 흥국생명의 지갑 사정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게 쉽게 보이시죠. 그나마 6월말 기준 유동성비율은 103%를 기록하며 개선세를 보였다고 합니다.
외화채권시장 '먹구름'
시장에서는 보험사 외화채권에 대한 신뢰도 하락과 투자 위축을 초래할 것이란 우려가 나옵니다. 그리고 일부 현실화되고 있다고 해요. 최성종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이행이 선언된 지난 1일 보험사 신종자본증권 외화채권 가격이 기준가(액면가 100)에서 15% 급락했고 어제도 소폭이지만 더 하락했다"며 "가격이 당분간 하향 조정되는 게 확률적으로 더 높은 상황"이라고 했습니다.
유승우 DB금융투자 연구원은 "최근 레고랜드 사태로 국내 크레딧 시장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진 상황에서 이번 콜 미행사로 시장의 충격은 다른 시기에 비해 그 여파가 클 수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암묵적인 조기상환 책임에 대한 금기가 깨진 만큼 당분간 투자 심리가 약화될 수 있다는 것이죠.
다만 한쪽에서는 과도한 걱정은 자제해야 한다는 쓴소리도 나옵니다. 2009년 우리은행 건은 정부가 우리은행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콜옵션 미이행 파장이 컸던 것이고, 현재는 개별기업의 일이기 때문에 그 정도 수준으로 확대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기획재정부와 금융당국 역시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조기상환권 행사와 관련한 일정·계획 등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며 흥국생명과 지속적으로 소통해왔다"고 진화에 나선 바 있죠.
금융당국은 이날 DB생명의 조기상환권 행사 연기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을 내놨습니다. "이미 사전에 충분히 협의한 사항이며, 앞으로 시장상황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겠다"고 시장을 안심시켰죠. 그러면서 "DB생명의 신종자본증권은 해외 발행이 아닌 국내 발행건으로서 해외 투자자와 관련이 없다"고 우려가 중첩되는 걸 막았습니다.
PS. 아 한가지 더. 이번 콜옵션 미이행으로 흥국생명이 문을 닫게 될 우려는 없습니다. 수익성에 대한 문제지, 건전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험금 지급능력자체에 대해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가지고 있는 자본이 줄어든 게 아니어서입니다. 흥국생명에 보험을 가입한 금융소비자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보험을 급히 해지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얘깁니다.
총 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댓글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