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은행들의 안정적인 수익원 역할을 톡톡히 해주던 전세대출에 비상등이 켜진 모습이다. 최근 불거진 '전세사기' 사태에 이어 '깡통전세'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주택기금 보증이 아닌 은행 재원으로 내준 전세대출의 경우 원금까지 받지 못할 가능성까지 커지고 있다. 언제나 안전할 것이라 여겨지던 '전세대출'이 은행의 새로운 리스크로 부각되는 모습이다.
든든했던 전세대출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하나, 신한, KB국민, 우리, NH농협 등 5대 시중은행이 취급한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124조8795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들 은행이 취급하고 있는 가계대출 잔액규모가 677조원 규모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체 대출 잔액의 5분의1 가량이 전세시장에 몰려있는 셈이다. 그만큼 은행들이 적극적으로 공략해 온 대출시장이다.
그간 은행들에게 전세대출은 안정적인 수익원 역할을 해줬다. 전세대출은 집주인의 집을 담보로 잡는 데다가 다른 대출과는 달리 만기 까지 세입자는 매달 이자만 갚아도 되는 구조다. 전세대출이 부실화 하는 경우는 극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만기가 통상 2년으로 짧은데다가 금리 역시 변동 금리였기 때문에 시장의 상황에 따라 취급했던 대출에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을 가늠하기도 쉬웠다. 연간 경영계획을 세울때도 이만한 '효자'가 없었다.
위기 때마다 찾아오는 전세 '위기론'
전세는 영문으로도 'Jeonse'라고 표기할 정도로 우리나라에만 있는 매우 독특한 주거형태다. 1970년대 도시 개발 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전세라는 제도가 자리잡았다는 게 금융권 안팎의 중론이다.
은행들의 '전세대출'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2000년대 중후반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정부는 전세대출의 대출 한도를 6000만원으로 제한했지만 2008년 이후 줄곧 한도를 상향해왔다. 현재 전세대출 한도는 최대 5억원에 이른다. 은행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대출을 더욱 많이 취급할 수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전세대출 시장을 적극 공략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를 놓고 보면 우리나라의 금융시장은 크게 세 번의 위기가 있었다. 외환위기(IMF), 리먼사태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19 이후의 경기침체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매번 위기마다 전세라는 주거 형태는 위기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된 바 있다.
은행 고위 관계자는 "깡통아파트라는 말이 생긴것이 외환위기때가 처음이고 리먼 사태로 야기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깡통전세에 대한 우려가 깊었다"라며 "이는 전세가 단순 주거형태가 아닌 투자의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 금융시장의 흔들리면 자연스럽게 위기가 전이되는 영향이 컸다"라고 설명했다.
원금도 못 받을 판…고민커진 은행들
금융감독원이 내놓은 국내은행의 연체율 현황 자료를 보면 은행들이 취급한 주택자금대출 연체율은 0.20%로 높은 수준은 아니다. 전체 가계대출과 기업대출을 합한 연체율이 0.33%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체 대출중에서도 상환이 잘 되는 대출로 분류가 가능하다.
전세대출의 경우 주택자금대출에는 포함돼 함께 연체율을 집계하나, 전세대출만 따로 때어놓고 봤을 경우 연체율은 더 낮을 것이란 게 은행권 관계자의 설명이다. 주택구입을 위해 빌리는 주택담보대출은 일정 기간 거치기간이 지나면 원금과 이자를 함께 갚아나가야 하지만, 전세대출의 경우 대부분 만기까지 이자만 상환하기 때문이다.
현재 은행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부분은 만기 이후다. 통상 전세대출 원금은 만기 종료 이후 대출을 받은 세입자로부터 받는다. 대부분의 세입자는 이 원금을 집주인에게 집 보증금 형태로 맡겨두고 만기가 되면 돌려받아 대출을 갚는 구조다.
그런데 최근 전세사기, 깡통전세 우려 등이 나타나면서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세입자가 늘어나고 있다. 은행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원금을 회수하지 못할 처지에 놓이게 된 셈이다.
집주인은 전세계약이 끝난 시점에 기존의 세입자와 계약을 갱신하거나 새로운 세입자를 구해 기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반환해야 한다. 이 사이 전세가격이 하락했다면 집주인 입장에서는 새로운 세입자에게 받는 보증금으로 퇴거하는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
이 경우 신용대출 혹은 주택담보대출을 받아야 하지만 집주인의 채무가 늘어나면 세입자가 전세대출을 받기 꺼려할 수 있어 자금조달이 쉽지 않다. 은행 입장에서는 전세시장의 불안은 곧 원금회수의 불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은행 관계자는 "최근 시장 불확실성이 확대되면서 모든 대출의 연체율이 상승하는 등 부실채권 규모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며 "그동안 안전한 대출 시장으로 분류되던 전세대출 부분에서도 세입자들이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해 대출을 갚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의 방침에 맞게 세입자들이 장기저리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은행의 단기적인 수익에는 부정적일 수 있다"며 "다만 금융소비자와의 상생, 장기적으로는 원금 회수까지 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세입자를 우선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시장변동에 따라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내주지 못하게 된 집주인들의 재무건전성을 위해 은행의 대출 등 자금조달 여력 확대를 위한 방안 마련도 필요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이와 관련 최근 주요 은행들은 전세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해 전세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대출차주들을 위한 저금리 대환대출, 만기연장 등의 다양한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아울러 정부는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반환할 수 있도록 관련된 대출을 확대하는 방안도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