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일에 무심한 듯 집안에만 들어앉아 있던 재계의 안주인들이 바깥출입을 한 지는 꽤 됐다. 사회봉사나 문화·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가 하면 그룹이나 계열사의 공식 명함을 들고 경영 전면에 나서는 안주인들은 요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창업주 최진민(81) 회장의 부인 김미혜(66) 귀뚜라미복지재단 이사장은 그런 존재다. 알짜 계열사의 대표 자리에 수십 년간 앉아 있었다, 경영 보폭이 결코 좁지 않았다. 김 이사장의 존재감을 띄엄띄엄 볼 수 없는 이유다.
부창부수. 김 이사장이 올해 5월 대표 자리를 비웠다. 최 창업주가 2019년 11월 지주 체제 전환을 계기로 하나 둘 주력사 대표직을 내려놓은 것과 맞물려 김 이사장 또한 계열 경영에서 한 발 빼는 모습이다. 2세 체제의 도래를 알리는 또 다른 징후일 수 있다.
문화재단 주식 vs 복지재단 부동산
귀뚜라미 ‘문화재단’과 더불어 소속 공익법인 중 하나인 ‘복지재단’은 2003년 1월 설립됐다. 최 회장의 개인 부동산, 김조씨의 현금(123억원), ㈜귀뚜라미 등 계열사들의 현금(39억원) 출연으로 만들어졌다.
현재 총자산은 377억원(2021년 말 기준)이다. 자산 중 주식·출자지분이 74억원으로 계열사 주식도 있기는 하지만 비주력사 위주이고, 지분도 얼마 안된다. TBC(대구방송) 4.46%를 비롯해 센추리 2.86%, 닥터로빈 2.18% 등이다.
‘[거버넌스워치] 귀뚜라미 ④편’에서 얘기한 대로 문화재단이 지주회사 귀뚜라미홀딩스(16.16%)를 비롯해 난방분야 주력사 ㈜귀뚜라미(20.07%) 등 굵직굵직한 계열사들의 지분을 적잖이 보유한 것과 대비된다.
즉, 복지재단은 귀뚜라미그룹 지배구조 측면에서 보면 문화재단에 비할 바 못되지만 그렇다고 허투루 볼 재단이 아니다. 최 창업주의 출자 내역에서 볼 수 있듯이 부동산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재단이어서다. 보유 자산 중 토지·건물이 249억원으로 주를 이루는 이유다.
먼저 서울 강서구 화곡동 소재 ‘귀뚜라미홈시스텔’을 가지고 있다. 강서구청입구 교차로 인근 교통요지의 지하 4층~지상 12층짜리 오피스텔(96세대)이다. 2006년 준공했다. 서울 용산구 한강대로변 지하 2층~지상 5층 건물 귀뚜라미빌딩의 주인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다. 서울 강서구 귀뚜라미보일러사옥빌딩의 건물주는 지주회사 귀뚜라미홀딩스지만 땅은 복지재단 소유다.
귀뚜라미 복지재단 설립 이래 현재까지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가 김 이사장이다. 복지재단이 그룹의 알짜배기 부동산을 적잖이 보유한 재단이라는 점에서 보면, 김 이사장이 갖는 무게감이 남달라 보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귀뚜라미그룹은 서울 강서구 마곡동에는 귀뚜라미냉난방기술연구소를 두고 있다. 대지면적 9900㎡에 지하 3층, 지상 11층 규모로 2018년 12월 준공했다. 귀뚜라미의 신성장동력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R&D) 센터다. 이 건물은 ㈜귀뚜라미(50%), 나노켐(20%), 센추리·귀뚜라미범양냉동·신성엔지니어링(각 10%) 5개 계열사 소유다.
나노켐, 2020년까지 오너 부부 경영
김 이사장은 주요 계열사 경영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바로 나노켐이다. 2000년 3월 이사회에 합류한 뒤 2010년 3월에 가서는 직접 대표 자리에 앉았다. 특히 2014년 4월~2020년 12월 최 회장이 대표로 있는 동안에는 부부가 함께 경영을 총괄했다.
사업구조가 묘했던 계열사이기도 하다. 최 회장 일가가 대주주로 있었던 데다 내부거래를 통해 안정적으로 성장해왔다는 데 기인한다. 펌프, 모터, 센서, 컨트롤러 등 보일러 부품을 생산하는 나노켐의 사업 성격에서 찾을 수 있다.
김 이사장이 대표에 오른 2010년 당시, 최 회장 일가(4명)는 나노켐 지분 45.27%를 보유했다. 이외 지분은 옛 ㈜귀뚜라미가 31.38%, 귀뚜라미문화재단이 23.35%다. 매출은 470억원이다. 이 중 ㈜귀뚜라미를 비롯해 계열 매출 비중 82%(433억원)이나 됐다. 영업이익으로 58억원(이익률 12.4%)을 벌어들였던 해다.
다만 2019년 11월 귀뚜라미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은 나노켐의 지배구조와 경영구도에도 변화를 몰고 있다. 지금은 대주주가 교체된 상태다. 1대주주가 지분 52.82%를 보유한 홀딩스다. 이어 문화재단이 변함없이 23.35%로 뒤를 잇고 있다.
홀딩스 및 재단 외의 23.83% 중 일부는 여전히 최 회장 일가 몫으로 추정되는데 예전 보다는 상당폭 축소될 것을 볼 수 있다. 맞물려 최 회장 부부도 대표직을 내려놓은 상태다. 2020년 12월 최 회장에 이어 올해 4월 김 이사장 또한 대표에서 물러났다.
공교롭게도 2019년 기점으로 나노켐의 벌이는 점점 축소 추세다. 작년 매출 594억원 중 ㈜귀뚜라미 매출이 92%(549억원)로 귀뚜라미 의존도는 지금이라고 달라진 게 없지만 수익성이 신통찮아졌다. 2010~2018년 31억~59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던 나노켐은 2019~2021년에는 15억~22억원에 머물고 있다.
김 이사장이 나노켐 대표에서 물러나면서 현재 계열사 대표직을 갖고 있는 곳은 외식 프랜차이즈업체 닥터로빈 정도만이 눈에 뛴다. 2015년 8월 이후 대표 명함을 가지고 있다. 전문경영인 송경석(57) 귀뚜라미홀딩스 대표와 2인 대표 체제다.
닥터로빈은 2005년 11월 설립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현재 전국에 19개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3녀 최문경(43) 상무가 초창부터 운영을 해왔던 곳이기도 하다. 김 이사장이 딸과 함께 외식사업을 챙기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