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모직이 패션사업을 분리해 에버랜드에 매각하기로 했다. 매각대금은 1조500억원이다. 제일모직은 이번 매각을 통해 그동안 패션과 소재사업으로 분리돼 있던 역량을 소재사업에 집중하겠다는 계획이다.
에버랜드는 트렌드에 민감한 테마파크와 골프사업 등 축적된 노하우에 패션사업을 결합할 경우 시너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계열사간 사업인수를 통해 상호간 '윈-윈'하는 거래라는 반응이다.
패션사업 매각에 따라 삼성가의 두딸인 이부진 사장, 이서현 부사장의 역할 조정에도 관심이 쏠릴 전망이다. 이부진 사장은 에버랜드 경영담당을 맡고 있고, 이서현 부사장은 제일모직의 패션을 키워왔다.
◇ 업(業)의 본질을 찾다
이번 패션사업 매각은 평소 이건희 회장이 강조해온 '업(業)의 본질' 측면에서 접근하면 수긍이 간다. 삼성의 모태는 물산과 제당, 그리고 모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삼성전자, 삼성생명으로 대표되는 제조와 금융이 두개의 축이다. 패션사업은 현재 삼성의 주력 제조업, 특히 제일모직이 주력해야 하는 사업과는 차이가 있다.
제일모직 입장에서 그룹의 모태인 패션사업을 살리면서도 소재에 집중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은 셈이다. 여기에 트렌드에 민감한 패션사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현재 삼성의 계열사중 패션사업을 인수할 만한 곳은 에버랜드가 가장 적격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 대규모 테마파크와 골프사업 등을 통해 축적한 소비자들의 동향에 대한 분석은 에버랜드가 가진 강력한 경쟁력이다. 소비자들의 기호를 따라간다는 점에서 패션사업과 업의 본질이 크게 다르지 않다.
◇ 에버랜드, 시너지 기대..제일모직, 소재에 집중
에버랜드는 이번 패션사업 인수를 통해 '의식주 종합회사'로 변신한다는 계획이다. 제일모직이 보유한 글로벌 디자인 역량이 기존 사업에 결합될 경우 질적인 성장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테마파크와 골프장 운영 등에서 축적한 노하우를 이용할 경우 최근 업계 주류로 부상한 패스트 패션과 아웃도어 등에서 새로운 시너지 창출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다. 또 기존 건설과 조경 등 주(住) 기반 사업, 푸드와 식재료 유통 등 식(食)기반 사업과 함께 의식주 관련 종합회사로 거듭나게 됐다.
김봉영 삼성에버랜드 사장은 "이번 인수를 통해 패션 사업을 중장기 성장의 한 축으로 적극 육성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모멘텀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패션사업을 분리한 제일모직은 전자재료, 케미칼 등 소재에 집중하게 된다. 제일모직은 2000년대 초반부터 전자재료를 집중 육성해왔다.
현재 제일모직의 소재사업은 전체 매출의 70% 가량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소재의 역량강화에 집중해 왔다. 사실상 '제일모직'이라는 사명과 어울리지 않는 사업구조다. 최고경영자 역시 소재와 패션을 분리해 임명해왔다.
박종우 제일모직 소재사업 총괄사장은 "이번 패션사업 양도 결정은 제일모직이 글로벌 소재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 핵심 사업에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며 "공격적이고 선도적인 투자를 통해 차세대 소재의 연구개발과 생산기술의 시너지를 획기적으로 높여 선도업체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부진 사장(왼쪽), 이서현 부사장 |
◇ 주목받는 이부진·이서현, 향후 역할은?
이번 패션사업 매각이 주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삼성가의 두 딸들이 관여된 회사간 거래이기 때문이다. 이부진 사장은 현재 에버랜드의 경영전략담당을 맡고 있다. 이서현 부사장은 제일모직의 패션부문을 육성했고, 최근에는 경영기획을 담당하며 소재분야도 관장하고 있다.
때문에 디자인을 전공한 이서현 부사장의 영역으로 분류되던 패션사업이 이부진 사장이 담당하는 에버랜드로 매각됨에 따라 향후 이들간 역할이 어떻게 조정될 것인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일단 이서현 부사장이 패션사업을 맡은 후 의욕적인 행보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에버랜드의 패션사업에 일정부분 참여하지 않겠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 경우 에버랜드내에서 이부진 사장과의 역할조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부진 사장과 이서현 부사장의 에버랜드 지분은 8.37%로 동일하다.
반면 이서현 부사장이 이번 기회에 패션사업을 넘기고, 제일모직의 소재사업 육성에 주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이부진 사장이 기존 에버랜드의 사업과 아울러 패션을 도맡는 구조다. 한편으로는 이부진 사장에게 힘을 실어주는 결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영능력을 다시 검증하는 수순일 수도 있다.
이와관련 삼성 관계자는 "공식적인 영업양도는 12월인 만큼 당분간은 현재 상황에서 변화는 없다"며 "연말 인사에서 보다 명확한 정리가 이뤄지지 않겠느냐"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