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의 국내 맥주시장 진출로 가장 고민에 빠진 것은 하이트진로다. 오비를 추격하기도 바쁜 마당에 롯데의 추격마저 뿌리쳐야 할 판이다. 오비와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등장한 변수다.
하이트진로의 입장에서는 롯데의 등장이 달가울 리 없다. 최근 마케팅 측면에서의 변화를 꾀했지만 성과 여부는 아직 불분명하다. 여기에 '유통 공룡' 롯데가 들어왔으니 역량을 분산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하이트진로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다.
◇ '물'로 되찾은 왕좌의 자리
사실 국내 맥주 시장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것은 하이트진로였다. 조선맥주로 시작해 양질의 맥주를 생산하며 초기 국내 맥주시장을 호령했다. 하지만 동양맥주의 마케팅 전략에 밀리며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동양맥주는 일찍부터 마케팅에 눈을 떴지만 조선맥주는 그렇지 못했다. 오로지 품질만 좋으면 소비자들이 선택할 것이라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비즈니스가 그렇듯 품질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마케팅 전략이다.
▲ 조선맥주는 지난 91년 페놀사태를 계기로 맥주 시장 1위를 탈환했다. 그동안 제품 품질에만 매진했던 것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마케팅 전략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동양맥주와의 차별을 위해 하이트진로는 '물 마케팅'을 선보였다. 이후 사명도 하이트로 바꾸는 등 2000년대 들어서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
"오비 주세요"가 곧 "맥주 주세요"가 됐던 시절, 조선맥주의 마케팅 전략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오비=맥주'라는 등식을 소비자들에게 심어줬던 동양맥주의 전략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조선맥주는 쓰린 속을 달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조선맥주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페놀사태로 사면초가에 몰린 동양맥주를 '물 마케팅'으로 밀어붙였다. 사명도 깨끗함을 강조하는 '화이트(White)'와 비슷한 '하이트(Hite)'로 바꿨다.
'지하 150m 천연 암반수'를 강조한 하이트의 마케팅 전략은 성공했다. 잃어버렸던 맥주 시장 1위 자리를 되찾아왔다. 여기에 부실의 늪에 빠졌던 진로를 인수하며 하이트진로는 국내 주류 시장의 절대 강자로 부상했다.
◇ 'd'출시로 휘청..집중력 부족 절감
2000년대 들어서까지 하이트진로의 성장은 계속됐다. 2006년 시장점유율 59.7%를 기록하며 오비맥주와의 격차를 크게 벌렸다. 당시 오비맥주의 점유율은 40.3%였다. 소비자들이 마시는 맥주 10병 중 6병이 하이트였다.
하지만 이후 하이트진로의 성장세는 둔화되기 시작했다. 오비맥주로 사명을 바꾼 동양맥주의 공격적인 마케팅에 조금씩 밀렸다. 결국 지난 2011년 말에 오비맥주에 다시 왕좌를 내줬다. 이후 둘간의 격차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하이트진로의 실패 원인은 '마케팅 역량의 분산'이다. 오비맥주가 마케팅 역량을 '카스'에 집중했던 반면, 하이트진로는 '하이트', '맥스'에 이어 새로 론칭한 'd'에 집중했다. 오비는 공격적인 마케팅이 가능했지만 하이트진로는 그렇지 못했다.
▲ 하이트진로는 2010년 젊은 층을 겨냥한 맥주 'd'를 출시한다. 그리고 모든 마케팅 역량을 'd'에 집중했다. 하지만 부작용이 만만치 않았다. 기존 브랜드인 '하이트'와 '맥스'의 점유율이 지지부진해지면서 전체 시장 점유율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d'도 갈수록 점유율이 떨어졌고 마침내 지난 2011년 '카스'에 집중한 오비맥주에게 맥주시장 1위자리를 내줬다. |
사실 하이트진로의 '하이트'와 '맥스'는 시장에서 호평을 받고 있었다. 특히 맥스의 경우 국내 최초 '100% 보리맥주'로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젊은층을 겨냥한 'd'를 출시하면 하이트진로는 마케팅 역량을 'd'로 모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맥스'는 물론, 새로 론칭한 'd'도 뚜렷한 특징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점유율이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당황한 하이트진로는 'd'의 도수를 낮췄지만 소비자들의 선택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 사이 오비맥주는 '카스'를 중심으로 계속 점유율을 끌어 올렸다. '맥스'에 대항해 100% 보리 맥주인 '오비골든라거'를 출시하는 등 발빠르게 움직였다. 최근에는 하이트진로의 에일맥주 '퀸즈에일'의 대항마로 '에일스톤'을 선보였다.
업계 관계자는 "하이트진로의 경우 시장을 선도하는 제품을 많이 내놨지만 마케팅 전략의 부재와 분산으로 번번히 실패했다"며 "반면, 오비는 제품 출시는 하이트진로에 비해 시기적으로 늦지만 탁월한 마케팅 전략으로 이를 따라잡았다"고 말했다.
◇ 롯데의 도전, 선제적 대응으로 막는다
롯데의 등장은 하이트진로에게 부담 요인이다. 수년 전부터 업계에 롯데가 맥주 시장에 진출한다는 소문일 돌면서 하이트진로는 대응책 마련에 고심했다. 기존과는 다른 마케팅 전략을 선보이지 않는 한 '샌드위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 뻔했다.
하이트진로는 최근 '하이트' 맥주를 전면 리뉴얼했다. 21년만이다. 다분히 롯데의 등장을 의식한 대응이다. 하이트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이트'에 변화를 줘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목적이다.
오비와 달리, 하이트는 쫓는 입장이다. 롯데의 등장으로 하이트는 '쫓고 쫓기는' 입장이 됐다. 따라서 현재 선보이고 있는 3개의 맥주 브랜드 중 하나라도 시장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
▲ 하이트진로는 최근 '하이트'맥주에 대한 대대적인 리뉴얼을 단행했다. 21년만의 일이다. 롯데의 맥주시장 진출 전에 시장 장악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롯데가 막강한 유통력을 바탕으로 시장 잠식에 나설 경우를 대비해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게 디자인은 물론, 맛까지 모두 개선했다. 롯데의 등장에 대비한 선제적 대응인 셈이다. |
'하이트' 맥주 리뉴얼은 이런 마케팅 전략 전환의 시발점이다. 비록 롯데가 내놓는 제품들이 하이트진로의 제품군과 겹치지는 않지만 향후 롯데가 같은 종류의 제품을 선보일 것에 대비하는 차원이다.
또 막강한 유통력을 보유한 롯데를 누르기 위해서는 강력한 브랜드 파워가 있어야한다는 내부적인 고민의 산물이기도 하다. 롯데가 초반에 기선을 잡기 전에 대응하지 못할 경우 우려했던 '샌드위치'현상이 현실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트진로 고위 관계자는 "롯데의 맥주 시장 진출에 대한 대비는 이미 오래전 부터 진행해 왔다"며 "이미 품질 측면에서는 검증을 받은 만큼 강력한 마케팅 전략과 효과적인 대응으로 반드시 1위 자리를 되찾을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