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는 안팎으로 변화의 시기다. 다가오는 2020년은 올해보다 더 간단치 않은 사업 환경에 놓일 것이라는 예상이 짙다. 주요 대기업 내부에도 세계 시장에서 생존하기 위해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를 헤쳐내야 할 대기업집단 총수들의 머릿속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경자년(庚子年) 새해를 준비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의 경영 판단과 생각의 방향을 주요 열쇳말로 추려 들여다봤다.[편집자]
선대 회장님의 사업보국(事業報國) 이념을 기려 우리 사회와 나라에 보탬이 되도록 하자.
<2019년 11월19일, 호암 이병철 회장 32주기 추모식후 사장단 오찬에서>
같이 나누고 함께 성장하는 것이 세계 최고를 향한 길입니다.
<2019년 11월1일, 삼성전자 창립 50주년 기념 행사 영상문구>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최근 몇해 못지않게 조마조마한 한 해를 보냈을 성싶다. 작년 2월, 1년여 수감생활을 마치고 나와 경영복귀 2년차를 맞은 올해는 재계 1위 삼성의 수두룩한 경영 현안들을 다뤄야 했다. 주력인 반도체의 시황 악화와 일본의 경제보복 대응 등 사업 이슈만 고민하기에도 일분일초가 아까운 한 해였을 테다.
하지만 관리해야 할 리스크는 바깥에만 있지 않았다. '1등 삼성'이 전부가 아니라 '착한 삼성'이라는 밖에서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게 무엇보다 먼저 해내야 할 숙제였다. 흔한 사회적 책임 차원의 구호가 아니었다. 요즘 삼성이 어느 누구보다 '상생'과 '동반성장'을 강하게 부르짖는 데는 이 부회장의 절박함이 담길 수밖에 없었다.
◇ 여전히 남은 법적·사회적 리스크
지난 17일 삼성전자는 이사회 의장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판사 유영근)가 삼성물산과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조합 와해공작 혐의로 재판을 받던 이상훈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에게 징역 1년6개월 실형을 내리며 법정구속토록 한 것이다. 함께 유죄가 인정된 삼성 임원이 26명이나 됐다.
삼성은 이미 작년에 지난 80년간 유지해오던 무노조 정책을 깼다. 삼성의 성장 과정에서 생긴 사회적 그늘을 걷어내려 노력 중이었다. 판결 이튿날인 18일에도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공동으로 "과거 회사 안에서 노조를 바라보는 시각과 인식이 국민 눈높이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음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 입장을 내놨다. 하지만 만시지탄(晩時之歎)이었다.
이재용 부회장으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삼성전자에 대표이사와 별도로 이사회 의장이 생긴 것도 사실 이 부회장이 2017년 2월 특검에 구속된 것이 계기였다. 그룹 컨트롤타워로 불리던 '미래전략실'을 해체하는 한편 각 계열사 투명경영 의지를 내보이고 전철을 밟을 가능성을 차단하려 '이사회 책임경영'을 강화한 조치였다. 하지만 그 이사회 의장마저 구속되면서 또 먹물이 튀었다.
이 부회장은 작년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나 있지만, 같은 해 8월 대법원이 서울고법으로 사건을 파기환송하면서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다. 내년 1월 네 번째 공판이 예정돼 있다. 지금까지 세 차례 공판에서 재판부는 삼성전자가 준법경영 감시제도를 더욱 체계적으로 확립할 것과 다시 정치권력에 의해 뇌물을 요구받을시 대응 방법 등에 대해 그룹 차원의 투명경영 의지를 제시하라고 주문하던 상황이었다.
이 부회장 신경을 곤두서게 할만한 재판 리스크는 또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증거인멸 관련 사건이다. 역시 지난 17일 1심에서 재판에서 "자료일체가 그룹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인멸·은닉됐고, 이로 인해 삼성바이오 분식회계 의혹의 실체적 진실 발견에 지장을 초래할 위험이 발생했다"며 유죄가 선고됐다.
노조 와해 사건이나 삼성바이오로직스 사건은 이 부회장 파기환송심 재판과 별개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재계는 자칫 이 부회장에게까지 불똥이 튈 수 있다고 보고있다. 검찰이 두 사안 모두 최고경영진까지 보고선이 닿은 것으로 보고 있는 데다, 바이오로직스의 경우 2015년 옛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과 연결돼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이어진 사안이라는 점에서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도 이 부회장에게 기업 총수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의 최근 행보도 삼성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는 관측이다. 그가 최근 스웨덴 발렌베리과 만난 것도 공식적으로는 5세대 이동통신(5G) 협력 등을 위한 것이지만, 속으로는 발렌베리가 지닌 '상생 기업' 인식을 품어오려는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 다시 만들어야 할 신성장동력
메모리에 이어 파운드리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분야에서도 확실한 1등을 하겠습니다. 굳은 의지와 열정, 그리고 끈기를 갖고 꼭 해내겠습니다.
<2019년 4월30일, 시스템반도체 비전 선포식>
법적 리스크는 꽤 묵직하지만 삼성은 겉으로 겸허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사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히 다르다.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위기감을 피력하면서 적극적인 투자와 공격적인 태세를 보이고 있다.
가장 과감한 승부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다.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이병철 선대 회장,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를 세계 1위로 키운 이건희 회장 뒤를 이어 시스템 반도체까지 섭렵해 한국을 명실상부한 반도체 1위 국가로 올려놓겠다는 게 삼성과 이 부회장의 야심찬 계획이다.
이 부회장은 올해 초 "2030년에는 메모리 1위는 물론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에서도 1위를 달성하겠다"고 비전을 밝혔다. 이어 지난 4월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133조원을 투자하고 전문인력 1만5000여명을 채용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도 "원대한 목표 설정에 박수를 보내며 정부도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화답했다.
업황이 부진한 디스플레이 분야에도 이재용 부회장은 공격적인 태세를 주문하고 있다. 그는 지난 8월 충남 아산 디스플레이 사업장에서 "LCD 패널 상황이 어렵다고 대형 제품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며 "신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해 미래를 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10월 삼성디스플레이는 2025년까지 차세대 기술인 퀀텀닷(QD) 디스플레이에 13조1000억원을 투입하는 대형 투자 계획을 내놨다. 기존 LCD 라인을 단계적으로 QD 디스플레이 라인으로 전환하며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게 골자다.
인공지능(AI)과 5세대 이동통신(5G)도 이 부회장이 놓치지 않으려는 미래사업이다. 그는 지난달 '삼성 AI포럼'에서 "오늘의 삼성은 과거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미래였다"며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기술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고 AI 사업을 독려했다. 5G 사업에 대해서도 "도전자 자세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캐시카우'인 스마트폰 사업 역시 품질에 완벽을 기하는 동시에 신제품 출시효과를 극대화해 기세를 이어가기 위해 채찍질 중이다. 첫 폴더블(foldable) 폰 '갤럭시폴드'가 출시를 늦춘 끝에 올해 석 달만에 50만대를 팔며 붐을 일으킨 것처럼 내년 폴더블 폰 후속작과 '갤럭시S11'도 돌풍을 이어간다는 게 목표다.
다만 이 부회장은 눈 앞의 실적보다 긴 호흡에서의 생존경쟁력을 만들어 내는 것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 6월 전자 관계사 사장단 간담회에서 "단기적 기회와 성과에 일희일비하면 안된다.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도 삼성이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은 장기적이고 근원적인 기술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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