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백악관이 오는 12일(현지시간) 삼성전자와 제너럴모터스(GM) 등 한·미 반도체·완성차 기업을 불러 회의를 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참석 기업 면면을 볼 때 회의에선 세계적인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에 대응하는 방안이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삼성전자의 자동차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를 부른 것에 미국 정부의 다른 의도가 숨어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번 회의 계획이 한·미·일 3국 '안보 수장 회동' 전후로 알려졌다는 점에서 삼성에 대한 정치적 압박도 예상된다.
◇ 백악관, 삼성전자 불렀다는데…
5일 업계와 블룸버그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백악관 안보·경제 관련 고위 관료들은 오는 12일(현지시간) 삼성전자와 GM, 글로벌파운드리(GF) 관계자를 불러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를 논의하기로 했다. 백악관에선 제이크 설리번(Jake Sullivan) 국가안보보좌관, 브라이언 디즈(Brian Deese) 국가경제위원회 국장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 주재로 이런 회의가 열리는 이유는 세계적인 반도체 품귀 현상과 관련이 있다고 업계는 분석하고 있다.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장기화로 반도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데 이어 미국 한파와 일본 지진, 대만 가뭄 등 자연재해가 잇따르며 반도체 공장들의 생산에 차질이 빚어지면서다.
이미 현대기아차, 폭스바겐, 토요타 등 글로벌 완성차의 생산 차질은 가시화하고 있다. 컨설팅 기업 알릭스파트너스 등에 따르면 올 1분기 완성차 생산 차질 물량은 100만대 이상, 생산 피해액도 최대 610억달러(68조7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차량용 반도체는 생산 업체가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단기간에 정체를 해소하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이런 까닭에 적어도 올 3분기까지 수급 차질이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다소 의아한 점은 차량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상당히 미미한 삼성전자를 호출했다는 대목이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Omdia)에 따르면 차량용 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NXP(10.2%), 인피니온(10.1%), 르네사스(8.3%)가 3강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이어 TI(6.9%), ST마이크로(6.9%), 보쉬(4.7%) 등이 뒤를 잇는다. 삼성전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삼성전자를 포함한 한국 기업의 점유율은 2% 수준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관계자도 "일부 파운드리(위탁생산)를 하는 물량이 있기는 하나, 직접적인 차량용 반도체를 많이 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2018년부터 자동차용 프로세서 '엑시노스 오토'(Exynos Auto)와 이미지 센서 브랜드 '아이소셀 오토'(ISOCELL Auto) 등 차량용 반도체 브랜드를 출시한 바 있다. 독일 아우디에 '엑시노스 오토 V9' 프로세서를 공급하기도 했으나, 이후로 공개된 파트너사는 없다.
◇ 다른 의중 있을까?
사정이 이런 까닭에 백악관이 삼성전자를 부른 이유가 차량용 반도체 문제에 국한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삼성전자의 미국 내 투자 확대, 더 나아가 중국이 아닌 미국 기업과 손을 잡으라는 압력을 넣을 수도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아직 패를 던지지 않은 '투자 카드'를 고려할 때 미국 정부가 눈독을 들일만한 상황이라는 점에서다. 삼성전자는 2019년 차량용 반도체 등이 포함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도 세계 1위를 차지하겠다며 133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최근에는 미국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이 2월 한파 탓에 한달가량 가동을 멈췄다가 이달 들어 정상 가동에 돌입했고, 미국 내 공장 증설 계획도 검토중이다.
백악관은 삼성전자의 투자 카드를 얻기 위해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이번 회의 소식을 다룬 블룸버그 등 외신 소식이 1일(현지시간) 백악관의 언론 백브리핑 이후 나왔다는 점에서 이같은 분석이 나온다. 당시 백악관은 백브리핑에서 2일(현지시간) 열린 한·미·일 3국 안보 수장 회동 계획을 설명하며 반도체 공급망 문제도 논의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차량용 반도체는 안전성과 보안 문제를 이유로 오랜 신뢰 관계를 형성한 기업끼리 거래가 이뤄지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미국 정부는 장기적으로 한·미·일 반도체 완성차 기업의 안정적 공급망을 구축해 중국 기업을 견제할 것이란 관측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 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차량용 반도체 생태계는 안전성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에서 완성차 기업과 반도체 기업이 얼라이언스(전략적 제휴관계)가 형성된 것이 특징"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탑승하는 차량의 특성상 높은 안전성이 요구되고, 이것이 부족할 경우 리콜 등 상당한 리스크(위험)에 직면할 수 있기에 공급망 구축도 상당히 중요한 요소란 얘기다.
◇ '계산기 두드리는' 삼성전자
그러나 삼성전자 입장에선 무턱대고 미국 주도의 생태계에 줄을 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중국은 미국보다 큰 거대 시장이기에 어설프게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이 코로나19 이후인 지난해 5월에도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을 방문할 정도로 신경을 쓴다. 게다가 지난달에는 시안 공장이 증설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중국 매체를 통해 전해지기도 했다.
이같은 복잡한 사정을 반영하듯 삼성전자는 미국 정부의 초청 사실부터 회사 측 참석자 등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입을 열지 않고 있다.
다만 이번 미국의 노림수를 떠나서라도 삼성전자가 차량용 반도체 사업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현재까진 글로벌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 절대 강자가 없는 반면 시장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IHS 마킷에 따르면 전세계 차량용 반도체 시장 규모는 지난해 380억달러(약 42조8000억원)에서 오는 2026년 676억달러(76조2000억원)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반도체 공장 증설은 하루 아침에 결정되거나 바뀔 수 없는 것"이라며 "(세금 혜택 등이) 좋은 조건이 아니라면 투자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중함과 자신감 모두가 녹아있으나, 시장에 설명 가능한 명분과 함께 실익도 있다면 어느 쪽이든 선택할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