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대응책 마련에 한창이다. 중국 의존도가 높은 원자재 공급망을 다변화하려는 노력이다. 그중에서도 미국 진출에 힘쓰고 있는 LG에너지솔루션의 대응이 적극적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국내 업체들의 대응이 다소 늦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급망 확대로 인한 일시적 비용 증가 문제도 있다. IRA와 유사한 정책으로 알려진 유럽의 RMA(원자재법) 관련 대응도 필요한 상황이다.
K-배터리는 공급망 다각화 中
미국이 최근 발효한 IRA에는 전기차 보조금 조건이 담겨있다. 니켈, 리튬, 코발트 등 배터리 핵심 광물을 북미 혹은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에서 추출·처리·가공하거나 재활용한 것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다.
이 비율에 따라 보조금 규모가 결정된다. 내년까지는 40%를 충족하면 되지만, 점차 그 비중은 10%p(포인트)씩 늘어난다. 2025년에는 60%, 2027년 이후에는 80%를 충족해야 한다.
하지만 현재 핵심 광물의 생산·정제는 중국 등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에서 주로 이뤄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리튬의 경우 미국 FTA 체결국인 호주·칠레에서 생산되나 미체결국인 인도네시아에서 대부분이 정제된다. 흑연은 중국에서 생산되는 물량이 82%에 달하며, 전량을 중국에서 정제한다.
국내 업체도 원재료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배터리 소재 업체들이 주요 원재료의 70~90%를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IRA의 배터리 핵심 광물 조건을 충족하는 것이 쉽지 않은 셈이다.
이에 최근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북미 지역의 원재료 생산 기반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이중 원자재 공급망 확보에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LG에너지솔루션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최근 양극재 핵심 소재인 리튬·코발트·니켈 뿐만 아니라 음극재 핵심 소재인 흑연의 공급망까지 확보했다. 중국 의존도가 가장 높은 흑연의 공급망 다변화를 통해 한층 더 안정적인 공급망 구축에 나선 것이다.
LG에너지솔루션이 업무협약을 체결한 호주 흑연업체인 시라는 세계 최대 흑연 매장지인 아프리카 모잠비크 광산을 운영 중이다. 내년부터 미국 루이지애나주에 생산공장을 설립해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어, IRA 조건을 만족한다. 양사는 2025년부터 양산하는 천연흑연 2000톤을 시작으로 규모를 점차 늘려갈 계획이다.
규모 차이는 있지만 SK온과 삼성SDI도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SK온은 이달 호주 레이크 리소스에 지분 10%를 투자해 오는 2024년말부터 최대 10년 동안 고순도 리튬 23만톤을 공급받기로 했다.
삼성SDI는 구체적인 협력사를 공개하지는 않지만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지난달에는 배터리 원자재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중국 간펑리튬 주식을 매각하기도 했다. IRA 시행에 대비해 중국산 리튬 비중을 줄이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LG엔솔이 앞장선 이유
LG에너지솔루션이 원자재 확보에 가장 '진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국내 기업 중 북미 시장 확대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어서다.
LG에너지솔루션은 현재 홀랜드와 오하이오에 독자 공장을 운영 중이며 GM(제너럴모터스), 스텔란티스와의 합작을 통해 공장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LG에너지솔루션의 북미 배터리셀 제조 규모는 현재 13GWh(기가와트시)에서 오는 2025년까지 215GWh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SK온은 현재 가동 중인 조지아 공장에 이어 포드와 합작으로 배터리 공장 2곳을 건설, 오는 2025년까지 94GWh의 생산능력을 확보할 예정이다. 현재 북미에 제조 공장이 없는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의 합작사를 통해 2025년까지 23GWh 규모의 배터리 공장을 세운다.
기본적인 물량 차이도 있다.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8월 누적 기준 LG에너지솔루션의 배터리 사용량은 39.4GWh 규모였고, SK온과 삼성SDI는 각각 18.4GWh, 14.2GWh에 그쳤다. 양사의 규모를 합쳐도 LG에너지솔루션에 못 미친다.
국내 배터리 업체들이 공급망 다변화에 주력하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대응이 다소 늦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IRA가 시행되는 시점은 내년인데, 현재 이뤄지는 원재료 공급 계약은 대부분 2025년 이후에야 이뤄져서다.
산업연구원은 "당장 내년부터 시작되는 배터리 부품 조건을 곧바로 맞출 수 있는 여력이 될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이 경우 국내 배터리 기업들이 거래하는 완성차 업체가 세제 혜택을 받지 못하게 돼 매출 감소 등 부정적인 영향이 일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공급망 확보를 위한 시기적인 문제 외에도 비용 증가에 대한 우려도 있다. 한국신용평가는 "배터리 광물 채굴 및 제련 과정에서 황산화물 등의 환경오염 물질이 배출되고 있는 점 등을 감안하면 중국 이외 지역으로의 생산기반 확장에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원가 부담도 상승할 수 있다"고 짚었다.
이어 "개편된 보조금 지급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국내 주요 업체들의 소재·부품 공급망 및 지역별 생산능력 조정 등을 위한 투자전략에도 시기적·양적으로 상당 수준의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자국중심' 정책 흐름 어쩌나
더 큰 문제는 IRA와 같은 자국 중심 정책이 미국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연합(EU)는 내년 1분기 초안 공개를 목표로 원자재법을 고안하고 있다. 핵심 원자재의 역내 밸류체인 강화가 골자다.
원자재법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IRA와 마찬가지로 원재료의 '탈중국화'를 목적으로 한 법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최근 국정 연설에서 중국을 겨냥해 "한 나라가 거의 모든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고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IRA처럼 중국을 완전히 배제하는 법안은 아닐 것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유럽 입장에서는 IRA 발효로 사실상 미국 투자가 막힌 중국 기업의 투자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다. 실제 최근 중국 CATL은 IRA 발효 이후 유럽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헝가리에 대규모 투자를 결정하기도 했다.
이에 국내 배터리 업체들은 빠른 대응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는 입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원자재법은 미국 IRA와 비슷하면서도 다를 것"이라며 "상황을 지켜보며 유연하게 대응할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