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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의 세계]돈을 사랑한 게 죄는 아니잖아

  • 2020.07.13(월) 15:01

김병철·정영채·정일문 등 IB 출신 CEO의 그림자
성과주의+공격영업, 결국 사모펀드 부실 후폭풍

'한국형 헤지펀드'는 10년 전 기업의 창업‧성장‧회수 생태계에 자금을 공급하는 매개체로 출발했다. 이후 전문운용사들이 출현하면서 국내 사모펀드 시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가파른 성장의 대가는 잇단 사건사고라는 혹독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한때 K팝 열풍에 비견됐던 사모펀드의 존재감은 어느새 사기판, 복마전으로 변질되고 있다. 사모펀드의 태생과 총체적 부실 우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자들의 책임론까지 복잡다단한 사모펀드의 세계를 조명해본다. [편집자]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의 후폭풍은 펀드를 판매한 증권사들에도 거세게 몰아쳤다. 사모펀드의 매력에 너무 빠진 나머지 문제 펀드들의 부실 여부를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고 투자자들에게 팔았다는 책임론이 핵심이다.

이번 사태를 몰고 온 라임자산운용과 옵티머스자산운용 펀드를 가장 많이 판 증권사는 신한금융투자와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굴지의 대형사다.

공교롭게도 이들 증권사의 전·현직 최고경영자(CEO)는 모두 투자은행(IB) 업계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통한다. 김병철 전 신한금융투자 사장과 정영채 NH투자증권 사장,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가뜩이나 성과주의가 확실한 증권사 문화에 IB 특유의 공격적 영업 색채가 덧입혀지면서 리스크 관리에는 소홀했던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 라임은 신한금투, 옵티머스는 NH가 압도적 판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 현재까지 환매가 중단된 사모펀드 총 22개, 판매 규모는 5조 6000억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이번 사모펀드 사태의 불씨를 지핀 라임운용의 펀드 판매액은 1조6700억원가량 된다.

증권사 중에서는 신한금융투자가 라임운용 펀드를 압도적으로 많이 팔았다. 두 번째로 많이 판매한 대신증권(1076억원)보다 3배 많은 3248억원어치를 팔았을 정도다. 다음으로 메리츠증권(949억원), 신영증권(890억원), 한국투자증권(681억원), KB증권(483억원), 삼성증권(407억원) 등의 순이다. 

라임운용 펀드 중 손실이 사실상 확정돼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에서 투자원금 전액 반환 결정이 난 무역금융펀드(플루토 TF-1호)를 가장 많이 판 곳도 역시 신한금융투자다. 전체 판매액 2438억원 가운데 3분의 1인 888억원을 홀로 팔았다. 이중 배상 결정이 내려진 것만 425억원에 달한다. 신한금융투자는 사실상 라임운용과 더불어 이번 사고의 공모자로 지목된 상태다.

신한금융투자는 이외에도 지난해 원리금 상환 지연 사고가 발생한 독일 헤리티지 파생결합증권(DLS)을 3800억원, 최근 환매가 연기되면서 그 배경에 대한 의혹이 커지고 있는 젠투파트너스 펀드를 4000억원어치 파는 등 사모펀드 사태의 중심에 서 있다.

'제2의 라임'으로 불리는 옵티머스운용 펀드 판매는 NH투자증권이 독식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5월 말 기준 총 설정잔액 5127억원 중 88%에 해당하는 4528억원이 NH투자증권을 통해 팔렸다. 다음으로 한국투자증권(407억원), 케이프투자증권(149억원) 등의 순이다. 

◇ 팔 건 사모펀드뿐…성과주의+IB 공격영업 역효과 났나

금융투자업계에선 사모펀드 판매사들의 책임론과 관련해 자본주의 색채가 짙게 배인 증권업 특유의 성과주의 문화가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몇 년 전부터 증권사 일선 자산관리(WM) 영업부서에서는 팔 만한 상품이 없다는 볼멘소리가 계속해서 터져 나왔다. 공모펀드가 수익률 부진으로 시장의 관심에서 멀어진 가운데 대표 상품으로 밀었던 주가연계증권(ELS)과 파생결합증권(DLS)마저 잇따른 사고로 투자자들의 눈밖에 난 탓이다.

이런 가운데 WM 영업직원들에겐 사모펀드가 '가뭄 속 단비' 같은 존재가 됐다. 공모펀드보다 보수가 몇 배는 높은 데다 거액의 자산을 굴리는 '큰 손'들을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으니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법하다. WM에 강점을 지닌 대형 증권사들의 경우 기존의 고객 네트워크가 풍부하다 보니 사모펀드 판매에 특히 유리했다. 

수년간 증권사 리테일 업무를 담당했던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사모펀드 운용사들이 상품을 만든 후 강남의 유명 프라이빗뱅커(PB) 다음으로 찾는 곳이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형 증권사들"이라며 "중소형 증권사들은 팔고 싶어도 물량을 받을 기회조차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전했다. 

라임운용과 옵티머스운용 펀드를 가장 많이 판 신한금투와 NH투자증권, 한국투자증권 등은 평소 탄탄한 WM 기반에다 뛰어난 IB 역량으로 정평이 난 증권사들이다. 특히 이들 증권사 전·현직 CEO는 모두 IB업계에서 '레전드'로 간주된다.

지난 3월 라임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김병철 전 신한금융투자 대표는 동양증권 IB본부장 출신으로 '채권분야의 전설'로 꼽힌다. 신한금융투자(전신 증권사 포함) 역사상 첫 외부 출신 사장으로 선임돼 초대형 IB 도약의 중책을 맡기도 했다.

IB업계의 오랜 라이벌이기도 한 정영채 NH투자증권 대표와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대표는 1988년 증권가에 들어와 비슷한 길을 걸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정영채 대표는 대우증권에서 증권사 생활을 시작해 2005년 우리투자증권(현재 NH투자증권)으로 옮긴 뒤 대표를 맡기 전까지 줄곧 IB사업부 대표를 맡았고, 정일문 대표는 한국투자증권 전신인 동원증권 입사 후 32년 재직 기간 중 27년을 IB본부에서만 보냈다. 두 사람 모두 IB 분야에서의 혁혁한 성과를 인정받아 대표 자리까지 올랐다. 

이에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증권업 특유의 성과주의에 IB 출신 수장들의 공격적 영업 성향이 녹아든 증권사들이 수익을 우선시해 문제의 사모펀드들을 더 적극적으로 판 게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자체 리스크 관리가 느슨해졌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한 IB업계 관계자는 "IB 출신 대표가 이끄는 증권사들은 아무래도 위에서 적극적으로 영업을 밀어주는 분위기다 보니 영업 스타일이 상대적으로 공격적인 편"이라며 "일선 영업부서에서도 이런 경향은 비슷할 것"이라고 말했다.

NH투자증권의 경우 역설적이게도 지난해 정영채 대표 주도하에 업계 최초로 영업직원들의 핵심성과지표(KPI)를 폐지한 뒤 이번 사태가 발생해 더 곤혹스러울 법하다. 사측은 당시 KPI 폐지 배경에 대해 직원들의 실적 부담을 덜고 고객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결정이라고 설명했다.

◇ '억울한 부분은 있지만'…일단 책임은 진다

아직 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판매 증권사들은 사모펀드 운용사와 금융감독당국, 수탁 및 사무관리회사 등과 더불어 이번 사태의 주요 원인 제공자 중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억울한 부분도 없진 않다. 

옵티머스 펀드 사고의 경우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 봐도 운용사가 작심하고 사기 행각을 벌인 정황이 뚜렷하다. 현행 사모펀드 시스템에서 사모펀드 투자와 관련한 모든 정보를 운용사가 갖고 마음대로 판매사와 수탁, 사무관리기관에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판매사들이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제도의 빈틈을 노린 사기꾼에게 꼼짝없이 당했다는 주장을 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책임을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판매사로서 좀 더 꼼꼼하게 상품을 고르고 투자자들에게 팔 때 신중을 기했어야 한다는 지적에 대해선 변명의 여지가 없다. 거의 같은 펀드를 여러 개의 시리즈로 쪼개 팔아온 무리한 판매 행태는 증권사 리스크 관리의 허점을 여실히 보여줬다는 평가도 나온다.

주요 판매 증권사들도 무조건 책임을 회피하진 않겠다는 태도다.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갈수록 나빠지는 여론과 금융감독당국의 압박도 무시할 수 없다. 이에 판매사들은 피해를 입은 투자자들에게는 유동성 공급 차원에서 우선적인 보상을 하되 사고 당사자들과는 명확한 사실관계 확인을 통해 잘잘못을 가리겠다는 입장이다.

라임 사태는 금감원 분조위가 신한금융투자를 비롯한 무역금융펀드 판매사들에게 투자원금 전액을 돌려주라고 권고한 만큼 이를 본보기로 보상이 이뤄질 전망이다. 다만 투자원금 전액을 돌려주라고 한 것에 대해선 사모펀드 사태와 관련해 판매사들이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느냐를 두고 논란의 불씨가 여전히 살아있다.

옵티머스 사태의 경우 이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운용사의 사기 혐의가 더 짙은 데다 이해 당사자 간 문제도 좀 더 복잡해질 여지가 있다.

옵티머스 펀드 2대 판매사인 한국투자증권은 먼저 투자자들에게 펀드 만기 도래와 상관 없이 투자원금의 70%를 선지급하겠다고 밝혔다. 금액으로는 200억~300억원 수준이다. 한 해 당기순이익이 6000억~7000억원에 달하는 한국투자증권으로선 정확한 계산은 뒤로 미루더라도 문제가 더 커지기 전에 사태를 서둘러 수습하자는 의도가 엿보인다.

옵티머스 펀드를 4500억원 넘게 판 NH투자증권은 머리가 더 아프다. 투자자 보상 요구가 갈수록 거세지고 있지만 금액이 너무 큰 데다 비상장사인 한국투자증권과 달리 상장사로서 보상에 따른 손실이 자칫 배임 문제로 불거질 우려가 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NH투자증권 이사회에서 선보상안이 승인될지는 불확실하다. 게다가 사태의 주범인 옵티머스운용이 이미 심각할 정도로 부실화된 상태라 보상 후 구상권을 청구할 데가 마땅찮을 수도 있다. 

NH투자증권은 일단 투자자들에 대한 긴급 유동성 공급 차원에서의 선지급 방안을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밝힌 상태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선보상 결정이 계속 지연될 경우 여론은 더 악화되고 당국의 눈치 주기도 더 심해질 것"이라며 "NH투자증권으로선 상당한 압박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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