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퇴직연금이 국내에 도입된지 17년이나 지났지만 대다수 근로자는 퇴직연금을 방치해두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퇴직연금 연간 수익률은 2%다. 5년, 10년으로 기간을 넓혀봐도 1.93%, 2.39%에 머무르고 있다. 은행 정기예금보다 못한 수준이다. 부끄럽지만 기자 역시 퇴직연금을 현금성 자산 100%로 굴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 기자처럼 게으른 투자자들도 퇴직금 관리에 신경을 '써야만' 한다. 다음달 12일부터 디폴트옵션이 도입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자신의 연금을 방치할 경우 미리 지정한 적격 상품으로 운용된다. 이제라도 골방에 방치된 퇴직연금을 살펴볼 때가 됐다는 얘기다.
똘똘하게 목돈을 굴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서울 여의도 63빌딩 한화자산운용 사무실에서 퇴직연금 상품의 대표격인 타깃데이트펀드(TDF)와 타깃인컴펀드(TIF) 운용 전문가인 변재일 팀장을 만나봤다. 변 팀장은 한화운용에서 개인솔루션본부 WM솔루션운용팀을 이끌고 있다.
연금시장 판도 바꿀 디폴트옵션
한화운용은 지난해 10월 개인솔루션본부를 신설했다. 상품운용부터 영업, 마케팅, 디지털 플랫폼 개발팀이 연결돼 있다. 변 팀장의 비유를 빌리자면 철강 생산부터 부품 생산, 자동차 조립, 판매 등 전 과정을 모두 관리한다.
사실상 연금시장을 위한, 연금시장에 의한 조직이다. 변 팀장은 본부 설립과 함께 WM솔루션운용팀 리더로서 한화운용에 입성했다. 직전에는 한화생명에서 장외파생상품을 운용했으며, 10년 넘게 여러 자산운용사와 증권사에서 트레이딩을 담당했다.
변 팀장은 디폴트옵션 도입으로 연금시장 판도가 확 뒤집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디폴트옵션의 가장 큰 목적은 위험자산 위주의 포트폴리오를 개편하기 위한 것"이라며 "한번 정해 놓으면 반강제로 가입자들의 투자를 해야하기 때문에 원리금보장상품 위주인 현재와는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디폴트옵션에 원리금보장상품이 포함된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짚었다. 변 팀장은 "디폴트옵션 도입시 공모연금 시장이 엄청나게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점은 반갑다"면서도 "원리금 보장상품이 들어간 것은 다소 아쉽다"고 했다. 이어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천히 시간을 두고 제도 도입의 취지에 맞게 조금씩 개편돼 가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디폴트옵션은 개인투자자와 금융투자업계 모두에게 '윈윈'이라고 봤다. 금투업계로서는 위험자산을 기존 70%에서 100%까지 늘릴 수 있으니 운용보수를 더 많이 받을 수 있고 투자자들은 운용보수를 조금 더 내더라도 장기투자를 통해 수익률을 대폭 높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내게 맞는 TDF 어떻게 고를까
그는 디폴트옵션 시행 이후 특히 TDF 상품이 각광을 받을 것으로 전망했다. TDF의 약자를 풀어보면 '타깃데이트펀드(Target Date Fund)'다. 말 그대로 은퇴시기에 맞춰 목표시점을 정하고 나이에 맞게 자산 비중을 조정하는 상품이다. 사회초년생일 땐 공격적으로 주식비중을 높이고 은퇴시점이 가까워지면 채권 같은 안전자산 비중을 높이도록 설계돼 있다.
TDF가 주목받는 이유는 한가지 더 있다. 현재 디폴트옵션 상품이 되려면 고용노동부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데 유일하게 가이드라인이 공개된 상품은 TDF다. 적격 TDF로 지정되기 위해선 운용기간 동안 주식 비중이 80%를 초과하지 않고 목표시점이후 주식 비중이 40%를 넘지 않아야 한다.
변 팀장은 TDF 상품을 고르는 팁에 대해 조언했다. 첫 번째로 살펴야 하는 건 운용보수를 꼽았다. 그는 "고객들 입장에서는 판매 보수를 줄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면서 "상품을 온라인으로 가입하느냐, 지점에서 가입하느냐에 따라서 비용이 확 달라지는데 운용사 직판 앱 루트로 가입을 하면 판매 보수를 꽤나 절약할 수 있다"고 전했다.
두 번째는 투자자 본인의 투자목적과 투자성향을 파악하는 것이다. 대부분 은퇴시점에 맞춰 빈티지(2030, 2035, 2040, 2045, 2050 등)를 선택하는 게 기본이다. 그러나 투자성향이 위험지향적이라면 더 큰 숫자의 빈티지를 선택해 주식 비중을 높일 수 있다.
변 팀장은 "대부분의 자산이 퇴직연금에 들어있다면 정석적으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며 "만일 부동산, 채권 등 여러 자산에 들어가 있다면 굳이 은퇴시점에 맞춰 빈티지를 선택하지 않고 위험자산을 높이는 쪽으로 상품을 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금 전문가의 포트폴리오가 궁금하다는 질문에는 자신의 퇴직연금 포트폴리오를 공개했다. 퇴직연금 50%를 TDF2035에 배분하고 나머지 절반은 리츠 상장지수펀드(ETF), 해외주식 ETF, 국내주식 ETF를 비슷한 비율로 구성했다. 본래 부동산 자산 비중이 높은 탓에 위험자산 투자 비율을 높이기 위해 주식형 펀드로 분배해 투자했다는 설명이다.
아울러 퇴직연금 외에도 연금저축과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를 활용할 것을 권했다. 이직 시 청산받은 퇴직금을 일시 지급받지 않고 IRP 계좌로 이체하면 과세이연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또 연금저축과 IRP 계좌를 합산해 연간 납입금액 700만원까지 16.5%의 세액을 공제받을 수 있다.
변 팀장 역시 개인솔루션본부에 온 후로 꾸준히 연금저축과 IRP에 돈을 붓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시장이 정말 나쁘면 단기적으로 세액 공제를 받은 16.5%보다 더 수익률이 나빠질 수 있지만 장기투자로 가면 확정적으로 공제를 받고 손실을 보지 않을 확률이 높다"며 "결국 세금이 이연된다는 건 세금으로 빠져나가는 돈이 적어진다는 뜻이기 때문에 복리효과가 극대화된다"고 설명했다.
TDF로 벌고 은퇴 후 TIF로 꺼내 쓰자
문득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은퇴 이후 자산관리 방법도 궁금해졌다. 30년간 굴려 커진 목돈에도 관리가 필요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변 팀장이 꺼내든 상품은 TIF였다. TIF는 '타깃인컴펀드(Target Income Fund)'의 약자로 TDF와 반대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생활비가 만원이라고 가정해보자. 주가가 만원일 때는 1주만 깨면 된다. 그러나 주가가 내려가 1주 가격이 5000원이 된다면 생활비를 위해 2주를 팔아야 한다. 자산 손실 속도가 두 배나 빨라지는 것이다. 이를 관리해주는 상품이 바로 TIF다.
변 팀장은 "은퇴 이후에 무조건 원리금에만 다 맡기면 결국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을 수 없고 실질 자산 가치는 계속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TIF는 위험자산에 투자하면서 물가 상승을 방어하되 변동성을 잘 관리하는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화운용 TIF에 대해 "리스크 관리 기반으로 여러 전략을 적용하는 한편 방어적인 자산으로 구성해 변동성 관리에 유용하게끔 설계했다"면서 "변동성을 완벽하게 제어할 순 없지만 최대한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이어 "얼핏 밋밋해보이지만 그 방향이 옳다고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한화자산운용은 이달말 준비해온 TIF를 선보일 예정이다.
변 팀장은 인터뷰 내내 '변동성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소 재미없더라도 안정적으로 수익률을 관리하겠다는 것.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같이 말했다.
"고객을 마라톤에서 1등 하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레이스에서 낙오되지 않게 해드리겠다는 게 저희 모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