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시작된 지 6개월째에 접어든 가운데 가입자들의 갈아타기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원리금 보장 상품 중심인 은행과 보험업권에서 상장지수펀드(ETF) 등 상품 라인업이 다양한 증권업권으로 이동이 눈에 띈다.
그럼에도 투자자 입장에서 불편한 부분은 남아있다. 계좌 유형별 직접 이전이 막혀있는데다가 디폴트옵션은 실물이전이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다.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10월31일 실물이전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올해 1월31일까지 총 2조4000억원의 적립금이 타사로 이동했다. 이는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2024년 9월말 기준 400조원)의 0.6%수준이지만, 제도를 시행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란 평가도 나온다.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는 확정급여(DB)·확정기여(DC)·개인형 퇴직연금(IRP) 등 퇴직연금 계좌에 담고있는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도 다른 금융회사 계좌로 갈아탈 수 있는 제도다. 예금, 원리금보장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파생결합사채(DLB), 채권, 공모펀드(MMF제외), ETF가 실물이전이 가능한 상품군이며 지난해 10월31일부터 시행됐다.
실물이전으로 수혜를 가장 많이 본 금융업권은 증권이다. 제도 시행 이후 올초까지 증권사로 유입된 적립금은 4051억원을 기록한 반면 은행에선 4611억원 순유출됐다. 기업 입김이 상대적으로 많이 작용하는 DB유형에선 은행과 보험으로 순유입됐지만, DC와 IRP 등 개인이 관리하는 퇴직연금 계좌에서 증권으로 순유입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DC유형에서는 은행과 보험에서 증권으로 2115억원이 이동했고, IRP 유형에서는 3753억원이 증권으로 순유입됐다. 미래에셋증권, 한국투자증권 대형증권사로의 유입규모가 큰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지금은 같은 유형의 계좌끼리만 실물이전이 가능하다. 예를들어 KB국민은행의 DC 계좌에 담긴 상품을 실물이전 하려면 증권사의 DC 계좌로 옮겨와야 한다.
문제는 은퇴연령이 다가오면 통상 절세 혜택을 노리고 퇴직연금을 IRP 계좌로 이전하는 수요가 많다는 점이다. 만일 DB형이나 DC형으로 퇴직금을 운영하다가 일시금으로 받게 되면 퇴직소득세를 대폭 물어야 하기 때문에 가입자들은 IRP 계좌로 자금을 옮겨 연금소득세를 쪼개 내는 방식을 선호한다. 예를 들어, 은퇴한 퇴직연금 가입자가 KB국민은행에서 DC 계좌로 운영하던 연금을 증권사 IRP 계좌로 실물이전하고 싶더라도 이는 불가능하다.
아울러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상품의 이전이 막혀있는 것도 불편사항으로 꼽힌다. 지금은 가입자가 계좌를 타사로 옮기고 싶다면 이를 청산한 후 현금으로 만들어야 한다. 디폴트옵션 상품을 실물이전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 일종의 '허들'로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현재 은행 등 타업권에서 초저위험 상품으로 디폴트옵션 가입을 유도해둔 상태인데 이를 이전하려면 상품 포트폴리오 해지 후 이동해야 한다"며 "결국 투자자는 이율을 1%도 채 못받는 경우가 많아 손실을 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디폴트옵션 이전에 한해 특별해지이율을 적용하는 방안 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업권의 의견을 청취한 당국에서도 제도 활성화 차원에서 요청사항 수용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우선 하반기에 다른 유형의 퇴직연금 계좌끼리도 실물이전도 가능하도록 만들 예정이며, 실물이전이 가능한 상품군을 확대하는 것도 검토 중이다.
동시에 제도 안착을 위해 사업자들이 협조가 필요한만큼 금감원에서도 퇴직연금 사업자를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강화했다. 퇴직연금 운용실태 뿐 아니라 실물이전 절차를 제대로 준수하고 있는지 등을 살피기 위함이다.
금감원은 우선 올해 상반기 안에 삼성증권, 하나증권을 시작으로 미래에셋생명, 광주은행에 대한 검사에 착수한다. 하반기에도 4곳을 추가로 선정해 살펴볼 예정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전 사업자를 대상으로 모든 유형에서 원칙대로 이전을 시키고 있는지 살펴볼 예정"이라며 "고객입장에서는 가급적 편하게 이동이 가능하도록 실물이전이 안되는 대상을 줄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실물이전 제도가 활성화될 경우, 증권사 실적에 기여하는 바도 클 것으로 보인다. 신승환 나이스신용평가 연구원은 지난 14일 리포트을 통해 "퇴직연금 시장의 성장 가능성과 이로 인한 잠재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퇴직연금 사업에서 경쟁우위를 확보한 증권사들에게 자산관리 역량 강화와 경상적인 이익창출력 보완의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 연구원은 "퇴직연금 머니무브의 향방에 따라 수익 기반 및 사업안정성이 유의미하게 개선되는 증권사의 경우 신용등급에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