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경제력집중 현상은 어디까지 가고 있는 것일까? 돈이 돌지 않는 모습만 보아도 이미 그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편에서는 단 몇 백만 원을 갚지 못해 「신용회복」을 신청하는 소상공업자, 골목상인들이 줄을 잊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고액권 퇴장, 금괴 사재기, 초고가 미술품 은닉, 대규모 외화자금의 조세피난처 도피 의혹이 일고 있다. 아무래도 대공황 직전 신대륙의 상황을 되돌아보고 교훈을 얻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미국 경제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대량생산 시대가 열리면서 풍요와 함께 해외자본까지 유입되어 과도한 유동성이 주식시장과 부동산시장으로 몰려들어 거품을 초래하였다. FRB는 선제적 대응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가 뒤늦게 과도한 통화긴축정책을 허겁지겁 펼쳤다. 그렇지 않아도 꺼질 때가 되었던 거품은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처럼 산산히 부서져 나갔다. 1929년 9월 3일 뉴욕 주식시장 주가 대폭락을 신호탄으로 부동산시장이 폭락하고 뒤이어 3차례에 걸쳐 약 10,000개에 이르는 은행이 도산하였다. 경기후퇴가 긴 시간에 걸쳐 지루하게 진행되었다.
1929년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 직전의 상황을 보면, 단 1%의 부유층이 국부의 40%를, 0.3%의 소수가 주식배당금의 80% 정도를 차지하였다. 철도, 자동차, 라디오 등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산업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사람들과의 경제적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게 되었다. 자유방임주의 내지 중상주의 사고가 팽배한 가운데 약육강식 논리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었다. 정부가 민간부분의 경제활동에 개입하는 것은 시장기능을 해치고 자원배분을 왜곡시킬 수 있다며, 후생과 복지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경제력집중은 급기야 소비수요를 급격하게 단절시켜 유효수요 부족 사태를 초래하였다. 재고품은 쌓여가고 실물상품과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돈이 돌지 않게 되었다. 대공황의 기나긴 터널이 시작되었다.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는 실물부분과 이를 지원하여야 할 금융부분이 연결되어 상호작용하지 못하고, 따로 따로 움직이게 되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극심한 궁핍에 시달리는데, 소비할 데도 없고 투자할 데도 없이 남아도는 돈은 (부유층으로 하여금) 투기 활동을 선호하게 하였다. 「풍요 속의 빈곤」은 대기업과 자본가, 뱅커들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며 사회적 불만으로 변하였다.
대량생산 시대가 열리면서 미국경제를 흥청거리게 하였던 「요란한 20년대(Roaring Twenties)」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순간 갑자기 막을 내리게 되었다. 스타인벡(J. Steinbeck)이 묘사하듯이, 미래를 기약하지 못하는 빈민들이 정처 없이 떠도는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시대가 도래 하였다. 남아도는 곡물이 창고에서 썩어 가는 반면에 굶주림과 절망의 행렬, 그리고 분노의 눈초리가 익어가는 포도송이처럼 늘어났다. 기나긴 불황의 터널을 뚫고 산업생산과 고용이 정상 수준을 회복한 것은 12년이 지난 1941년, 주가가 직전 수준을 회복한 것은 25년이 지난 1954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대공황으로부터의 탈출은 말할 것도 없이 유효수요를 진작시키는 일이었다. 먼저 금본위제도 아래서 금값을 크게 올려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켜 돈을 돌게 하였다. 다음 부자들의 끈질긴 방해 압력을 뿌리치고, 최고 누진 세율을 80%까지 끌어 올렸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의 사심 없는 지도력이 없었다면 미국이 대공황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이 더 더뎠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빈부 차이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사는" 시장경제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본주의 사회의 필요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격차가 극심해지면 아무리 뛰어도 살아남기 어려운 「격차사회」로 변질된다. 오늘날과 같은 “분배 없는 수출”, “고용 없는 성장”시대에 적자생존 논리만을 고집하다, 먹이사슬이 망가지면 결국 그 맨 꼭대기까지 위태롭게 된다. 공룡시대도 오래 지탱하려면 먹이사슬의 뿌리가 튼튼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다.
▲ 영화 분노의 포도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