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경제 질곡의 그림자는 돈이 돌지 않는 모습으로 집약돼 비춰지고 있다. 돌고 돌아야 할 돈이 돌지 않는, 돈의 풍요 속 빈곤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돈을 웬만큼 풀어도 돈이 돌지 않다보니, 한쪽은 돈이 홍수가 되어 넘쳐흐르고 다른 쪽은 가뭄귀신이 들어 메마르다. 4대강에는 썩어가는 물이 넘실거리는데, 인근 논밭에서는 쩍쩍 갈라지는 땅을 보는 것과 같다.
돈이 돌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물론, 고령사회에 대한 불안으로 말미암은 소비심리 둔화, 생산자와 소비자 직거래에 따른 유통단계 축소도 부분적 원인이다. 그러나 상품과 서비스의 반대 방향으로 도는 돈을 돌지 않게 하는 근본적 원인은 빈부격차 심화에 따른 가계의 소비수요 기반 붕괴다.
통계청 2014년 가구동향을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소득 1분위(하위 20%) 1천만 명 이상의 1인당 연간소득이 700만 원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월 60만원이 채 안 되는 소득으로 집세, 쌀값, 약값 등을 내고나면, 무슨 소비여력이 있겠는가? 소수 부자들의 소비성향이 제 아무리 높더라도 한사람이 천사람, 만사람 몫을 소비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부자들은 해외에서 소비하는 경향이 있다. 돈이 돌기 어려운 지경이다.
가계의 소비활동이 침체되면 불가피하게 기업의 투자와 생산 활동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과도한 빈부격차는 서민, 가계뿐만이 아니라 결국에는 부자나 대기업에게도 타격을 입힌다. 아무리 좋은 상품을 만들어내는 기업도 가계의 소비능력이 부족하면 성장과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초원이 황폐해지면 백수의 왕 사자도 먹잇감이 없어지고 결국에는 생존이 불가능해지는 이치와 같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기업이 자금의 잉여주체가 되고, 가계는 자금의 적자주체라는 기형적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가계가 여유자금을 예금, 채권, 주식 투자로 운용하는 과정에서 기업은 투자자금을 조달받는다. 그런데 상당수 대기업들은 유보자금이 넘쳐나는 반면, 가계는 (악성)부채에 시달리는 상황이 만연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입장에서 세상을 보기 마련인가? 부채에 시달리는 가계는 혹여 금리가 오를까봐 전전긍긍하고, 재변 인사들은 저금리의 폐해를 들먹이고 있다.
우리나라뿐 만이 아니겠지만, 가계안정보다 기업위주의 정책이 계속된 결과, 그 부메랑이 되돌아오고 있다. 수출부진도 국내 소비수요 부진에 따라 투자수요가 줄어들며 초래되는 부작용이다.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기술혁신, 생산성 향상도 연구실보다는 산업현장에서 장인들의 의해 더 많이 달성되고 있다. 한국경제는 물론 세계경제도 경제력 집중 현상이 더 이상 악화되면 돌이키기 어려운 재앙이 닥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돈과 관련해 풍요속의 빈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느 한 부분만을 관찰하고 거시경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하다가는 문제를 더욱 그르칠 수 있다. 가뭄과 홍수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데, 가뭄대책이나 홍수대책 어느 한 부분에 골몰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거시정책과 미시대책을 혼합하는 정책조합이 필요하다. 사실 한국경제의 고질적 병폐는 전체를 조망하지 않고 부분에 치우친 대책을 수립하는 구성의 오류에서 기인하고 있다.
지금은 사회복지가 아닌 경기회복 차원에서도 법인세, 소득세의 획기적 개편이 필요하다. 경제성장률이 바닥을 기면서 물가가 마이너스 조짐을 보인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금리는 제로금리 수준으로 과감하게 내려 고여있는 돈을 돌게 하여야 한다. 부동산 시장의 경우에도 가격보다는 거래활성화로 돈을 돌게 만들어야 한국경제의 숨통이 트일 수 있다. DTI나 LTV를 조정하여 가계담보대출 증가를 예방하는 동시에 취·등록세는 전면 폐지하는 조치가 시급하게 요구된다.
실물경제가 활기차게 돌아가면 돈은 저절로 돌아간다. 또 돈이 제대로 돌아가면 경제순환도 순조롭게 진행된다. 그러나 2015년 현재 가계로 하여금 없는 돈을 억지로 쓰게 할 수는 없다. 오늘날 한국경제의 굴레는 줄기차게 소비를 부추겼던 경기부양책의 저주였음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답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정말이지 너도나도 타성에서 벗어나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