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설렘 기억하시나요

  • 2018.02.15(목) 10:00

[페북 사람들]방보영 프리랜서 다큐감독


마당에는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부엌에선 어머니가 설음식을 만든다.


맛난 냄새가 울타리 밖까지 퍼져나가고
들뜬 소년은 신난 강아지와 마당을 뛰논다.


할머니가 전날 불려둔 쌀을 머리에 이고
방앗간으로 종종걸음을 옮기신다.


시간은 흘러 그 소년은 중년의 교수가 되었고
설 전날 밤 연구실서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소설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무뎌진 탓이지
어깨를 짓누르는 버거운 삶의 무게 탓인지
설날의 설렘은 향수로만 남아있다.

 


우리떡방앗간 박종선 씨는 설 2주 전부터
밀려오는 일감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가래떡을 하루에 8가마씩 만들어요.
바빠서 좋긴 한데 너무 힘들어서
빨리 설이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여러 단체에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눠줄
떡을 주문해 더 신경 써서 만들고 있어요."

 


가래떡은 쌀을 씻어 충분히 불린 다음 
물기를 빼고 소금을 넣은 후 빻은 다음
그 고운 가루를 통에 채우고
찜통에서 20분 정도 푹 찌면 된다.


맛있는 가래떡을 만들려면 좋은 쌀과 함께
소금과 물의 양을 잘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9남매와 함께 손자 손녀를 둔 할머니가
가래떡 나오길 기다리는 동안
옛날 방앗간 이야기를 하신다.

 

"나 어렸을 때는
동네에 방앗간이 한두 개밖에 없었어요.


새벽녘에 빨간 대야를 이고
먼 거리를 걸어가 줄을 서서 떡을 했어요.
몇 시간씩 기다려도 참 즐거웠어요.


모두가 넉넉하지 않은 시절이었지만
마음은 참 넉넉했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계속 말씀을 이어가는 동안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가래떡이
순백색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나와 몇 시간 기다렸다가
이렇게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가래떡을 뚝 끊어 먹는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손자 손녀들에게도 이 맛을 보여주려고
직접 방앗간에 와서 떡을 해요.
그래야 그나마 설 기분도 나고."

 


이발소의 연탄난로 연통이 반갑다.
지금까지 이런 이발소가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설 전날 아버지가 형과 내 손을 잡고
이발소로 데리고 갔던 추억이
낡은 이발소 이곳저곳에서 묻어 나온다.

 


이발소를 운영하는 안재성 씨는
17살 때부터 일을 시작해 올해로 53년째다.


"통금이 있던 시절 설 전 일주일은
통금 해제 시간부터 통금 시간까지
손님들이 가득했어. 힘든 줄도 몰랐지.


그걸 어떤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기분 좋게 들뜬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그런 기분은 다 사라졌지.

평일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잖아.

 

아직 잊히지 않는 기억이 있는데
예전 설날엔 설빔을 기대하잖아.
혹시라도 새 옷을 입을까 기대하는데
형이 입던 옷을 물려주는 거야.


얼마나 심통이 나던지 옷을 거꾸로 입고
동네를 돌아다녔더니 어머니가
개미심통부린다고 혼내던 기억이 나네."

 


재래시장 한쪽에는 설 대목을 기대하는
상인들의 마음처럼 과일상자가 가득 쌓여있다.


상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추운날씨 탓인지
시장은 대목을 잊은 듯 조용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셀 수 있을 만큼 한가했다.

 


중동청과를 운영하는 문정희 씨는
부천 중동시장에서만 20년째 장사하고 있다.


"올해는 솔직히 좀 기대를 했어요.
정부도 바뀌고 우리 서민들의 삶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싶었는데
큰 변화는 느끼지 못하고 있어요.


시장 상인들도 정부 탓만 하지 않고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시장 주변에만 6개의 대형마트가 있거든요.
재래시장에서 파는 상품들은
품질도 가격도 모두 경쟁력이 있어요.


그나마 저희 가게는 오랜 단골이 많아
그럭저럭 매출이 괜찮습니다. 
조금 불편해도 재래시장을 많이 찾아주세요."

 

▲ 왼쪽부터 김보경 최민정 박소진 추승희 김예빈 임유진 학생


김천예술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이
설을 앞두고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바람도 많이 불고 추운 날씨였다.
춥지 않냐고 묻자 다들 소리 내어 웃는다.


"안 추워요. 전시회를 보러 왔는데
설을 앞두고 전통 한복을 입고 싶었어요.
요즘엔 입을 기회가 거의 없잖아요.


외국인들과 사진도 찍고 너무 재미있어요.
사진 찍은 후엔 홍대도 갈 생각이에요.


오늘 저녁에 다시 김천으로 내려가니까
그 전에 서울 구경 다 하려고요."

 


설날 바람이 있으면 말해 달라고 하자
김보경 양부터 차례로 한마디씩 한다.


"평소에 부모님을 잘 못 봐요.
다 같이 즐거운 설을 보냈으면 좋겠어요."


"가족들이 감정싸움 없이 보냈으면 해요."


"아빠가 엄마를 많이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명절이 되면 엄마만 너무 힘들잖아요."


"저도 가족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한집에 살면서도
이야기를 제대로 한 적이 없어 아쉬워요.
연휴 때만이라도 많이 얘기하고 싶어요."


"명절에 함께 모여도 서로 스마트폰만 보고
왜 모였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가족끼리 윷놀이나 전통게임을 하면서
설날을 함께 즐겼으면 좋겠어요."


"저는 용돈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어요"라고
한 친구가 말하자 다들 맞장구를 친다.


그리곤 뭐가 그리 좋은지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게 다들 웃는다.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시절 설날의 들뜬 마음들이
왜 사라져가는지 이유를 알 듯했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그 연기를 마셔가며
가족이 먹을 음식을 정성스럽게 만들고


무거운 줄도 모르고 불린 쌀을
먼 방앗간까지 이고 가 가래떡을 만들어


따뜻한 떡국 한 그릇 나눠 먹으며
오순도순 이야기하던 그 풍경들이
그 시절은 있었고 지금은 없다.


이번 설만큼은 서로의 따뜻한 마음을 나누면서 
가정마다 새해 복이 가득 쌓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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