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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기업 팩트체크]③미이케탄광과 4700명의 조선인

  • 2019.09.24(화) 11:00

<비즈니스워치 특별기획 전범기업 분석> 미쓰이그룹
한반도·일본 등서 219곳 작업장 운영…'조선인 눈물' 곳곳
해체후 친목모임 결성…삿포로·도시바·후지필름·도요타 등

○○은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1941년께부터 1945815일 해방까지 사할린 소재 불상의 광산 및 일본 후쿠오카현 소재 미쓰이 광산에서 노무자의 생활을 강요당하다가 귀환한 피해자이다.

2016년 6월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 위원회(이하 대일항쟁기위원회)'가 발간한 활동결과보고서 부록에는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된 피해자 명부가 수록되어 있다.

피해자명부는 크게 ▲군인동원 ▲군무원동원 ▲노무자동원으로 나뉜다. 이 중 압도적으로 피해자수가 많은 것은 노무자동원이다. 전체 22건의 피해자명부 중 11건이 노무자동원이다.

각 노무자동원 피해자명부는 약 500쪽에 달하는데 이중 강제동원 기업명과 소재지가 확인된 곳도 있지만 어느 기업이 어디로 피해자를 강제동원했는지 확인되지 않는 곳도 다수다. 기업명과 소재지가 확인 되는 곳을 기준으로 집계한 결과 일본의 3대 재벌 중 하나인 미쓰이(三井)에 강제동원돼 노무자생활을 한 조선인 피해자는 1251명이다.

하지만 1251명은 어디까지나 피해자임이 확인되고 그 중에서도 미쓰이가 강제동원했다는 근거가 확보된 사례다.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연구위원은 "피해자라고 신고한 사람은 전체 강제동원 숫자의 3%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대일항쟁기 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전쟁 시기 조선인 노무자동원 수는 753만4429명이다. 하지만 피해신고를 받아 조사가 완료된 건은 22만6583건에 불과하다.

#미이케탄광 조선인노무자 4700피해자는 40

대일항쟁기위원회 활동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미쓰이그룹은 한반도와 일본 등 각지에서 219개의 작업장을 운영하며 조선인, 중국인 등의 노무자를 강제동원했다. 281개의 작업장을 운영했던 미쓰비시그룹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다.

부산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상설 전시돼 있는 도록에는 당시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됐다는 피해자들의 증거품들이 정리되어 있다. 여기에 미쓰이 로고가 새겨진 '팔띠'를 한 피해자의 모습이 남아있는 국민노무수첩도 있다.

피해자 이OO가 1943년 2월 3일 일본 후쿠오카현 오무타 국민취업지도소로부터 발급받은 국민노무수첩이다. 이 수첩에는 강제동원 된 미쓰이(三井)회사의 로고가 새겨진 완장을 찬 이OO의 사진과 출생·본적·거주지·취업 등이 기재되어 있다. 수첩을 통해 이OO가 1943년 3월 4일까지 일본 후쿠오카현 소재 미쓰이광산 미이케탄광으로 강제동원 된 후 1943년 3월 20일 훗카이도에 있는 도도로키 광산으로 다시 동원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OO는 강제동원지인 도도로키 광산에서 사망했다.[자료=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 상설전시 도록/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사진 속 피해자의 노무수첩에는 그의 출생과 본적, 거주지, 취업 등이 기재돼 있다. 이 수첩에는 피해자가 1943년 3월 4일까지 일본 후쿠오카현 소재 미쓰이광산 미이케탄광으로 강제동원된 후 1943년 3월 20일 훗카이도에 있는 도도로키 광산으로 다시 동원됐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피해자는 마지막 강제동원장소인 도도로키 광산에서 사망했다.

미이케탄광은 미쓰이가 운영했던 탄광 중 가장 큰 곳이었다. 당시 미이케탄광의 생산량은 일본 석탄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미이케탄광의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1944년초까지 조선인을 4700여명이나 강제동원했다는 역사적 아픔이 있다.

대일항쟁기위원회 조사 결과 미이케탄광에 동원돼 피해자로 결정되고 정부의 심의·의결까지 완료된 것은 약 40건에 불과하다. 미이케라는 탄광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거나 관련 근거자료가 있는 경우에만 피해자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피해자 이봉옥이 훗카이도 미쓰이광업소 스나가와 탄광으로 동원되었을 당시 수령한 급여명세봉투[자료=강제동원 기증자료집:사진류, 명부류, 문서류, 박물류, 기타/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옛 미쓰이의 부활

미쓰이그룹의 역사는 에도시대(1603년~18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73년 미쓰이 가문은 포목점 운영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미쓰이그룹의 시초다. 이후 미쓰이가문은 에도시대 후기에 이름을 날리는 거상집안이 된다.

1800년대 후반 미쓰이는 막부와의 거래관계를 통해 '미쓰이어용소'를 설립, 기업에 돈을 빌려주는 업무를 관장한다. 이후 미쓰이어용소는 지금의 미쓰이은행 설립에 큰 역할을 했다.

1908년 미이케항이 개항하면서 미쓰이는 미이케탄광의 석탄 수출량을 증대시켰다. 이듬해 미쓰이은행, 미쓰이물산(현 미쓰이 물산과는 관계없음), 미쓰이 광산을 묶은 지주회사 미쓰이합명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재벌체제를 갖춘다.

이후 조선인 강제동원을 통해 부를 축적한 미쓰이도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재벌해체 방침에 의해 미쓰이가문과 연관된 사람들은 모두 미쓰이그룹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된다. 공식적으로 1946년 9월 주주총회 결의에 따라 미쓰이본사가 해산한다. 1673년부터 이어져 온 미쓰이가문의 역사가 막을 내린 것이다. 당시 GHQ가 해체를 명령한 기업은 미쓰이·미쓰비시·스미토모·야스다 등 4대 재벌이었다.

하지만 미쓰이의 해체는 완전한 해체라고 할 수 없다. 1950년 게츠요우카이(월요회, 月曜会)라는 미쓰이그룹 계열사 친목회가 만들어졌다. 발족일이 1950년 2월 27일이 월요일이어서 게츠요우(월요일의 일본식 표현)로 이름이 붙여졌다.

이후 미쓰이 계열 14개사 사장단 논의를 거쳐 신(新)미쓰이물산이 재탄생한다. 미쓰이물산을 계기로 다른 미쓰이 계열사들도 하나둘 미쓰이그룹 안으로 모여들었다. 또 1965년에는 미쓰이 가문의 사료 수집과 조사·연구를 실시하는 미쓰이문고가 미쓰이그룹 계열사들의 협력으로 출범했다.

결국 조선인 강제동원으로 부를 축적한 옛날 미쓰이가 재벌해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부활한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쓰이그룹 스스로 지금의 미쓰이가 에도시대 포목점에서부터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고 밝힌 것과 일맥상통한다.

#월요회·니키회미쓰이와 관련된 회사들

현재 미쓰이 홍보위원회는 24개 회원사를 보유하고 있다. 맥주로 유명한 삿포로홀딩스부터 미쓰이스미토모건설, 제지기업인 왕자홀딩스, 미쓰이화학, 도요엔지니어링, 미쓰이물산, 미쓰이스미토모은행 등이 있다.

하지만 실제 미쓰이그룹과 관계있는 회사는 더 많다. 이는 미쓰이그룹이 GHQ의 재벌해체 이후 흩어져 있던 미쓰이그룹 계열회사들이 게츠요우카이(월요회, 月曜会)라는 친목회를 만들었고 여기에 가입하고 있는 일본 기업들이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게츠요우카이와 함께 1959년에는 신 미쓰이물산이 탄생하면서 니모쿠카이(이목회, 二木会)라는 것을 새롭게 결성했다. 니모쿠카이는 미쓰이그룹 핵심 계열사 사장들의 중요 모임이다. 미쓰이그룹은 게츠요우카이와 니모쿠카이 회원사를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등 주요 언론매체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게츠요우카이 회원사로 가입한 곳에는 삿포로맥주, 다이셀, TBS(TV도쿄), 도시바, 후지필름 등이 있다. 니모쿠카이 회원사에는 도요타자동차, 후지필름홀딩스, 도시바, IHI 등이 있다.

홍보위원회 소속 회원사와 게츠요우카이, 니모쿠카이 등 사장단 모임의 유기적 연관관계는 1992년 일본 공정거래위원회 사무국이 발간한 책에서 드러난다. '일본의 6대기업집단: 그 조직과 행동'제목의 책에 따르면 니모쿠카이가 미쓰이홍보위원회에 자금을 대고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옛 미쓰이그룹과 현 미쓰이 계열사의 연관성, 단순 친목모임 이상의 연결고리를 거듭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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