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뿌려놨다고 생각한다. 겨울엔 씨가 발아되지 않지만 그런 때일수록 공급 기반을 만들어놔야 한다."(권혁진 국토교통부 주택토지실장)
국토부가 재건축 첫 관문부터 힘을 빼던 '안전진단 규제' 완화를 끝으로 '재건축 3대 대못'을 모조리 뽑았다.
안전진단 평가항목에서 '구조안전성' 비중을 줄이고 조건부재건축 단지도 지자체가 요청할 때만 공공기관의 적정성 검토(2차 안전진단)를 받게끔 했다.
서울 양천구 목동 9·11단지를 비롯해 강남 46개 단지 등이 수혜를 입게 된다. 재건축 사업에 속도가 날 것이란 기대감이 나온다. 그러나 갈수록 부동산 침체가 심화해 공급 활성화로 이어지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목동'·'강남'에 '층간소음 단지'도 재건축
국토교통부는 8일 이같은 내용을 담은 '재건축 안전진단 합리화 방안'을 발표했다.
우선 안전진단 평가항목에서 유독 문턱이 높았던 '구조안전성' 배점을 조정했다. 현재 평가항목별 가중치는 △구조안전성 50% △주거환경 15% △설비노후도 25% △비용편익 10%다.
구조안전성에 높은 가중치를 두자 재건축 연한(30년)을 훌쩍 넘겨도 구조상으로 큰 문제가 없으면 재건축 첫 관문부터 막혔다. 주민들 사이에선 '건물이 다 쓰러져가야만 재건축이 가능하다'는 볼멘소리가 나오곤 했다.
국토부는 국민들의 높아진 주거환경 기대 수준을 충족시키겠다는 취지로 구조안전성 가중치는 30%로 낮추고 주거환경과 설비노후도 배점을 각각 30%로 높였다.
이에 따라 층간 소음이 심한 단지 등도 재건축할 수 있게 됐다. 국토부 관계자는 "오래된 단지일수록 층간소음 분쟁이 많은데, 주거환경 점수가 올라가면 이런 단지도 재건축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고 말했다.
'조건부재건축' 판정 점수의 범위도 축소한다.
현재 4개 평가항목별로 점수 비중을 적용해 합산한 총 점수에 따라 △재건축(30점 이하) △조건부재건축(30~55점 이하) △유지보수(55점 초과)로 구분해 판정하고 있다.
이중 '재건축'은 바로 재건축 추진이 가능하고 '조건부 재건축'은 재건축 시기 조정이 가능한 구간이다. 앞으로는 조건부재건축 점수의 범위를 45~55점으로 조정해 45점 이하는 바로 '재건축' 판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공공기관의 적정성 검토(2차 안전진단) 의무도 없앤다.
현재 1차 안전진단(민간 안전진단기관)에서 '조건부재건축' 평가를 받으면 의무적으로 해당 내용 전부를 국토안전관리원 등 공공기관에서 적정성 검토를 받아야 했다.
앞으로는 조건부재건축이라도 지자체가 요청할 때만 예외적으로 공공기관의 적정성 검토를 받으면 된다. 샘플 수를 잘못 산정하거나 필요한 시험을 거치지 않는 등의 '중대 미흡'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국토부는 이같은 개선안을 현재 안전진단 수행 중인 단지에도 '소급 적용'해 재건축 활성화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로써 서울 양천구 목동, 노원구 상계 등 안전진단을 추진 중인 주요 재건축 단지를 비롯해 재건축 연한을 채운 노후 단지들 모두 수혜 대상이 될 전망이다.
국토부에 따르면 기존 안전진단 평가항목 가중치에 따라 '유지보수' 판단된 단지 14곳은 개선된 가중치를 적용할 경우 '조건부재건축' 단지로 평가가 바뀌게 된다.
지역별로 서울 4곳, 경기 4곳, 부산 2곳, 대구 3곳, 경북 1곳 등으로 서울에선 양천구 목동신시가지 9단지와 11단지가 포함된다.
내년 1월 기준 서울에서 30년 이상 된 아파트 단지(200가구 이상)는 총 389곳(안전진단 통과 단지 제외)이다. 노원구가 79개 단지로 가장 많고 강남구 46개, 도봉구 34개, 송파구 23개, 양천구 및 강서구 22개 등이다.
공급 활성화?…"숨통 트이는 정도"
정부는 이번 규제 완화에 따라 재건축 활성화를 통한 주택 공급을 기대하고 있다.
앞서 2018년 3월 재건축 평가항목의 구조안전성 비중을 20%에서 50%로 확대한 이후 목동, 노원 등 서울 주요 재건축 단지가 줄줄이 안전진단 단계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국토부에 따르면 안전진단이 완료된 46개 단지 중 25개(54.3%)는 '유지 보수' 판정을, 21개(45.7%)는 '조건부 재건축' 판정을 받았다. '재건축' 판정을 받은 단지는 한 곳도 없었다.
같은 단지에 개선된 2개 기준을 모두 적용할 경우 '유지 보수' 판정은 11개(23.9%), '조건부 재건축' 판정은 23개(50%), '재건축' 판정은 (26.1%)로 바뀐다.
권혁진 실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그간 과도하게 강화된 기준으로 인해 재건축의 첫 관문도 통과가 어려웠던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안전진단 기준을 합리화하는 것"이라며 "이번 제도가 시행되면 도심 주택공급 기반을 확충하고 국민의 주거 여건을 개선하는 데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부동산 침체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어 이같은 규제 완화만으론 공급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올 들어 부동산 시장은 금리 인상, 집값 고점 인식 등이 맞물리며 매수심리가 크게 꺾인 상태로 재건축 해서 분양을 한다고 해도 흥행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엔 '단군이래 최대 재건축'으로 주목 받던 서울 강동구 '올림픽파크 포레온'(둔촌주공)까지 1순위 청약 마감에 실패했다.▷관련기사:둔촌주공 1순위 결국 서울서 마감 못했다…1.3만명 그쳐(12월7일)
재건축 규제 '대못'이 완벽히 뽑히지 않았다는 점도 여전히 걸림돌로 꼽힌다.
재건축 사업의 첫 관문인 안전진단을 넘는다고 해도 분양가상한제, 재건축초과이익환수제를 거쳐야 하는데 이들 모두 규제 완화의 폭이 적다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6월 발표한 분양가상한제 개편안을 적용해도 정비사업장의 분양가는 1.5~4% 상승에 불과할 것으로 추산됐고, 9월 나온 '재건축부담금 합리화방안'도 공공의 이익환수에 따라 사업성이 좌우될 수 있는 상황이다.
조건부재건축 단지의 경우 재건축 시기가 인위적으로 조정될 수 있다는 점도 관건이다. 국토부는 지자체장이 주택수급 상황을 종합 검토해 정비구역 지정 시기를 조정할 수 있게 했다.
권혁진 실장은 "현재 시기 조정이 가능한 조건부재건축 단지는 지자체장이 지역의 노후도, 이주수요 등을 고려해서 시기를 조정하고 있다"며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개념이 있어서 1년 단위로 기준을 리뉴얼해서 구체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윤수민 NH농협은행 부동산전문위원은 "이번 안전진단 규제 완화안은 이미 예견됐던 내용인 데다 3대 대못 모두 폐지가 아닌 소폭 완화 수준이라 큰 영향이 없어보인다"며 "안전진단 미통과에 대한 불안이 사라지면서 조합원들의 숨통이 트인 정도"라고 봤다.
서진형 경인여대 MD비즈니스학과 교수는 "집값 하락으로 분양가가 시세보다 높아지는 추세라 목동, 상계 등 입지가 좋은 주요 재건축 단지를 제외하고는 공급에 속도를 내기 어려워보인다"고 말했다.